21.01.18.
당신은 주 양육자의 눈치를 보는 아이처럼 늘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나에 대한 의존도도 절대적이었다. 온종일 “지은 씨!”를 외쳤고, 병이 악화되면서 기억이 뒤죽박죽되고부터는 기억마저 나에게 의존했다. 시아빠가 건네는 “이건 누가 준 거야?”, “오늘이 무슨 날이라고?”, “우리 오늘 점심에 뭐 먹었지?”, “이 노래는 제목이 뭐야?” 같은 간단한 질문들 앞에서 언제나 우물쭈물하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답을 알려달라는 신호다. 대신 답을 이야기해주면 이내 그 답을 얼른 낚아채 따라 말했다. 내 표정과 말투, 행동에 따라 당신의 기분이 정해졌기에 나는 당신 앞에서만큼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고, 늘 밝게 웃었다. 스테로이드 때문에 얼굴이 팅팅 붓고 반신 마비로 점점 말라가는 왼쪽 손발을 마주할 때면 한바탕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가도 조심조심 내 기분을 살피는 당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시아빠 역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수시로 이런 이야기를 건네었다.
“아무리 무거운 상황이어도 마음을 가볍게 가져가야 한다. 우리가 무거워지면 힘들어서 안 돼.”
암은 분명 커다란 불행이었지만, 우리는 그 불행을 그대로 받아 안지 않았다. 불행이 우리를 파괴하게 방종하거나 불행에 침몰되지 않고 그 안에서 기어이 기뻐할 것들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 덕분에 불행 한가운데에서도 온전한 행복을 맞이했다.
매번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바탕 웃었고, 손과 발을 씻기거나 서로의 얼굴을 부비는 등 꾸준히 상대를 만졌다. 햇살 좋을 때 당신이 좋아하던 산책로를 따라 함께 걸으며 노래 불렀고, 밥을 떠먹여줄 때마다 다정한 눈인사를 건네었다. “사랑해요”, “고마워요”라며 존댓말로 다정을 건네던 당신과 마주하는 그 짧은 눈맞춤이 그렇게 좋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대면 당신은 꼭 내 볼이나 입술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다른 환자들은 죽기 직전까지 온갖 욕과 히스테리를 부린다는데, 당신은 사랑만 보여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까지 최대한 밀도 높게 사랑했다.
시아빠는 그런 우리 모습을 볼 때마다 감동했다. 자꾸만 우리에게 “나는 너희가 이 정도로 사이가 좋은지 정말 몰랐다. 나는 그런 사랑 못 해봤다” 하며 감탄했다. 한번은 친구에게 아들 부부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내 자랑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야, 함께 50년 살아도 그렇게 사랑 못 하는 부부가 태반인데 5년 동안 그리 사랑한 게 훨씬 나은 인생이다. 그 정도면 잘 살았다” 했다고 한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다. 우리가 나중에 만났을 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까봐. 당신은 계속 만 35세인데 나는 70, 80에 가는 바람에 나를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당신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듯 몇 번씩 말을 걸었다.
“이환희 씨, 내가 누구야. 나 이지은이야. 이환희 아내는 이지은, 이지은 남편은 이환희. 잘 기억해둬요.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이건 잊으면 안 돼. 우리 조만간 다시 만나야 되니까.”
당신 발인하는 날, 장례지도사는 당신을 관에 넣은 뒤에 나에게 펜 한 자루를 건네었다. 당신 머리를 뉘인 관 위에 마지막 편지를 적으라는 의미였다. 고심하다가 짧게 한마디 적었다.
“이환희 씨, 나와 함께 살아주어 고마워. 다시 태어나도 내 남편 해줘. - 당신의 아내 지은.”
사람은 누구나 이별한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늘 다정했던 인연과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줄 알았던 가족 또는 친구와도 어떤 형태로든 헤어지게 마련이다. 시기와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비교적 일찍, 그것도 사별이라는 형태로 헤어졌지만 남들보다 훨씬 밀도 높게 사랑했다고 자부한다.
요즘 나는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남들 앞에서는 약식으로 하던 식사 전 기도도 요즘에는 눈을 꼭 감고 두 손 모아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 당신을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신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