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싶다던 남편, 일하기 싫다던 아빠

21.01.23.

by 아나스타시아

“지은 씨가 이제 저 일하지 말래요.”


방사선 치료를 위해 함께 병원을 가던 당신이 건넨 이 말에 엄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했다. ‘일을 안 한다니? 내 딸이 내 전철을 밟는 건가?’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은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꽤 부잣집이었다. 큰 가구공장과 꽃꽂이 학원, 꽃가게까지 한꺼번에 운영했으니까. 너무 바빠 돈 셀 시간이 없어서 비닐봉투에 대충 담아 집에 들어오면 나와 동생이 그 돈을 세겠다며 잠도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 나에게 메이커 옷 외에는 입히지도 않았고, 피부 하얘지라고 흰 우유와 인삼물로 목욕을 시켰다고 한다. 기억도 안 나는 그 시절 이야기들이 내 귀에는 꼭 전래동화처럼 들렸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아빠는 사업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이은 아빠의 사업 실패는 우리 집을 차상위계층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시점에 우리 네 식구는 엄마 옷가게 쪽방에 딸린 작은 방에 우겨 들어가 살았고,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가게 부엌에서 돼지코로 온수를 데워 목욕하고, 건물 공공화장실을 사용했다. 당신을 만나 결혼을 결심할 즈음에는 우리 부모에게 그나마 작은 집도 생기고 나도 따라 나와 살 정도는 되었을 때다. 그럼에도 공무원 부모 밑에서 안정적으로 자란 당신 눈에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하고 불안정한 집안이었을 것이다. 종종 당신은 우리의 작은 월급으로 우리 둘의 노후와 내 부모의 노후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해서 늘 미안했다.


사업이 망한 후 아빠에게는 본인 몸뚱아리만 남았다. 이렇다 할 기술 없는 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건설현장 노동 정도밖에 없었다. 이후 건설현장을 드나들었으나 정기적인 일자리가 아니다 보니 몇 달 월급 받다가 공사가 끝나면 또 몇 달쯤 쉬는 일을 반복했다. 아빠는 일하고 싶지 않아 했다. “내가 거기서 무슨 취급받는지 알면 그렇게 나가서 일하라고 말 못 할 거다”라고 했다. 그러나 아빠가 쉬는 동안에도 빚은 악착같이 불어났기에, 빚이 늘어나는 속도만큼 엄마의 스트레스도 비례해 늘었다. 엄마는 옷가게에다가 카드회사, 보험회사까지 쓰리잡을 뛰어다녔다.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빚에 지친 엄마는 나를 월급 받는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엄마는 세상에 안정적인 직업 같은 건 없음을 간과했다. 내가 월급받는 남자를 만나긴 했는데, 이렇게 일찍 회사를 그만두고 심지어 병수발까지 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엄마는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 아빠 무덤에 가서 ‘딸과 사위 좀 지켜달라는 그 부탁 하나 못 들어주냐’고 아빠에게 한바탕 큰소리를 내고 왔다고 한다.

stone-768723_1920.jpg

사실 엄마가 몇 달 동안 우리 집에 머물 수 있던 이유는 아빠 덕이 컸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잔인한데, 내 부모의 삶이 펴진 건 아빠의 죽음 덕분이었다. 그가 남긴 수억의 빚은 아빠의 목숨값으로 충당되었다. 근무 시간에 사망한, CCTV까지 찍힌 명백한 산업재해였고, 아빠가 비교적 큰 회사에서 하청 아닌 직영으로 일했기에 남들보다 산재를 쉽게 인정받았다. 엄마도 그 많던 일에서 빠져나와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먹고살 수 있게 되었기에 몇 달 동안 우리 집에 마음 놓고 머물렀다.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내가 빌려주었던 돈 1억 원을 일시불로 갚았다. 아빠 보험금이었다. 우리는 그 돈을 종잣돈 삼아 서울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빠는 자신의 빚을 스스로 갚았고, 자식들에게 되물림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름 할 만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엄마는 딸이 자기 전철을 밟을까 걱정했지만, 사실 당신이 돈을 못 벌게 막은 건 바로 나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복귀를 막았다. 병원에 입원한 당신 대신 감사인사를 한다는 핑계로 당신 회사에 찾아가 대표님과 면담하기도 했다. 당신과 다시 함께 일하고 싶다고, 1년이든 2년이든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는 사장님께 “저는 일 안 시키고 싶어요”라고 단호하게 굴었다. 혹시 당신이 복귀하고 싶다고 해도 그분이 막아주시길 바라면서. 비죽 새어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분 앞에서 한참 울면서 나 하고 싶은 말만 줄줄 읊다가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창피한 기억이다.


당신과 좀더 오래 함께하고 싶어서 부린 이 욕심이 잘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살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시아빠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복귀하면 작가들이 나 불쌍하다고 원고 주고 그러지 않을까?”라는 말을 했다는 소리에 가슴이 미어졌다. 집에서 쉬는 거 좋긴 한데 조금 지겹다고, “못해도 2021년에는 복귀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당신에게 “2년만 더 쉬자”라고 제안했다. 병원에서 예상한 수명이 3년이었으니까, 2년 뒤라면 더 살지 아니면 곧 떠날지 결과가 드러날 거라는 나름의 예상으로 제시한 수치였다. 결국 당신은 복귀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일을 사랑했던 당신은 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일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던 아빠는 일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누가 더 나은 죽음인지 잘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늘은 죽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