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가장한 무례함

21.01.25.

by 아나스타시아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고 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사라지는 건 그가 만들고 가꾼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특히 당신처럼 상대적으로 이른 죽음,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려 노력했던 사람의 죽음은 좀더 각별하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덕분에 당신이 떠난 후 넘치게 많은 위로와 애도를 받았고, 나 역시 그것들로 살아가던 순간도 있었다. 그 모든 위로와 애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곤 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보다 먼저 반려인을 잃은 지인이 충고했다. ‘앞으로 위로라는 이름의 수많은 무례함을 만날 것이며, 온몸이 돌아가며 아플 테고, 네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지 “사별해서 저렇구나”라는 딱지를 마주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세세한 말들에 무감해져야 한다’는 경험으로 얻어낸 귀한 충고였다. 당신이 떠나기 전에도 수많은 무례를 만났기에, 그 말에 ‘맞아, 정말 그렇겠다’ 생각하며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다.


지인이 말하던 그 시기인가 보다. 요즘 들어 마주하는 수많은 무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만 이틀간 두통이 가시지 않는다. 살아 있는 당신을 지키기에만 몰두했지, 죽은 당신도 더럽혀질 수 있음은 간과했다. 게다가 당신이 살아 있을 때는 시엄마 정도만 경계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낯모르는 이들의 무례마저 감당해야 한다. 누군가는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려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괜찮은 기삿거리로 생각한다. 그 무엇도 당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내가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며 달려들면 “사별해서 저렇구나”라는 딱지가 붙을까 겁이 나는 게 사실이다. 한껏 투사가 될 준비를 했다가도, 그 말이 무서워서 자꾸 주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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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당신과 달리 내 성격을 불을 닮았다. 심지에 지금처럼 예민할 때는 작은 불씨만 댕기면 순식간에 타오른다. 당신과 함께할 때도 나는 내 신념을 지키려다가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이런 성격이 왕왕 밖으로 드러나 누군가를 날카롭게 찌를 때도 있었다. 원가족과의 트러블, 직장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로 힘들어할 때마다 나는 당신에게 기대었다. 나를 다독이는 당신의 말은 언제나 부드러웠다. 상처받지 않게 내 마음을 잘 보살피면서도,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부분을 언급하는 당신이 언제나 든든했다. 지금처럼 ‘무감해지라’는 지인의 충고를 무시하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내 모습을 당신이 본다면 분명 안타까운 표정으로 “응, 자기가 생각하는 게 맞기는 한데, 자기가 어디가 어떻게 불편했는지 좀 시간이 지나고 얘기해 봐. 이 만한 일로 그 사람이랑 멀어진다면 얼마나 웃겨. 나한테 대하듯 부드러운 말투로 하면 괜찮을 거야”라며 다정함을 섞은 예리한 조언을 건네주었을 텐데.


화를 내야 하는 순간마다 당신이 그리워진다. 내 모든 고민을 가감 없이 터놓을 수 있던 내 친구, 무조적인 지지를 보내주던 내 편, 편견과 흥분을 중화시켜주는 선생 같던 당신의 부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제 내 날카로운 성격을 중화시키는 당신이 없으니, “사별해서 저렇구나”라는 말이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겠다. 왜 그들은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당신에게까지 상처주다 못해 당신의 부재까지 두드러지게 만드는가.


항의하기에 앞서 고민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여기서 멈추었을까, 아니면 한 발 더 나아갔을까. 불 같은 나라면 한 발 더 나아갔겠지만 온화한 당신은 실무를 담당하는 상대를 생각해 이쯤에서 멈추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멈추어야 할까. 언젠가 시아빠는 내게 “환희 몫까지 살아”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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