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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Feb 03. 2021

꽃으로 고백하던 날

21.02.03.

내 전 애인은 ‘남자가 사랑을 표현하면 자존심이 하락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장난 거는 것으로 애정표현을 대신했고, 함께 걸을 때 손도 잡지 않았다. 저만치 혼자 앞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지금 21세기를 사는 건지 조선시대를 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자꾸만 물었다. “나 사랑해?” 그때마다 어김없이 짜증 섞인 큰소리가 났다. “아, 좀! 그런 걸 대체 뭐하러 물어.”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고 “지금 함께 있는 것으로 대답이 된 거”라고 말했다. 본인은 대답했다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 이 기울어진 권력관계가 서글펐다. 


나중에는 ‘사랑한다’는 말 듣기를 포기하고 “나 꽃 좀 사줘”라고 졸랐다. 그가 꽃집 직원 앞에서 한껏 어색해하며 “여자친구가 좋아할 만한 꽃 좀 추천해주세요”라고 물어보길 바랐다. 그 어색함을 무릅쓰고 꽃을 사온다면, 그러면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무리한 요구’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언젠가 꽃을 안 사겠다고 버티는 그를 억지로 끌고 꽃집 앞까지 데려갔다. 가게 입구에 전시해놓은 꽃다발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걸로 사줘”라고 말했다. 그는 대답 대신 내 팔을 한껏 잡아끌어 그 상황을 모면했다. 이미 포장까지 끝난, 돈만 치르면 되는 그 꽃다발을 결국 안 사줬다. 


그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꽃을 한 다발 샀다. 사랑받지 못한 내게 보상해주고 싶었다. 2, 3만 원쯤 건네었더니 꽤 풍성한 꽃다발이 돌아왔다. 고작 꽃 몇 송이인데 그걸 받는 게 그렇게 힘들었다. 

그렇게 받기 힘든 꽃을 당신은 친구인 나에게 건네었다. 갓 세례를 받은 내게 “새로 태어난 걸 축하한다”고 적힌 손편지와 함께 장미 꽃다발을 쥐어주었다. 그 꽃다발을 무심히 바라보며 ‘이렇게 쉽게 편지와 꽃다발을 주고받을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는 뜬금없이 손수 만든 수정과 머핀과 편지를 한 장 쥐어주고는 도망(?)가기도 했다. “편지를 왜 줘요?”라고 물으니 “써달라면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써달라고 한 기억은 없지만 아무튼 고맙다’고 대답했다. 당신이 그대로 줄행랑친 뒤에 홀로 남은 나는 카페에 앉아 그 편지를 읽었다. 


“첫 만남부터 오늘까지 많은 여백들이 있긴 했지만 삶의 태도나 정치적 신념, 하는 일, 이제는 종교까지 많은 부분에서 유사했던 지은 씨와 제법 많은 이야기들을 쌓아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이야기들을 쌓는 시간이 나한테는 귀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여백 적은, 조금은 더 밀도 있는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음 좋겠네요.”


이 편지의 의도가 헷갈려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밀도 있는 이야기'가 친하게 지내자는 말이겠지?”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뭔 헛소리냐, 분명 좋아한다는 말 아니겠냐’는 친구들의 설레발에 “아냐, 이 친구 원체 다정해. SNS 보면 맨날 이것저것 만든 거 남들 나누어주고 그래”라며 부정했다. 말이 안 되었다. 애인 사이에서도 정말 정말 정말 주고받기 힘든 꽃과 편지를 이렇게 쉽게 쥐어주다니. 아무것도 아닌 날 건넨 당신의 꽃과 편지는 지금까지 내 연애상대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명 같았다. 그러니 당신이 그냥 ‘만인에게 다정한 독특한 사람’이어야지만 내가 아둔한 연애를 한 것이 아닌 게 되었다. 돌아보면 아까운 시간들이었다. 잡소리 그만하고 빨리 친구들 말 들었어야 했는데. 


당신과 사랑한 덕분에 숱하게 많은 꽃다발을 받았다. 내 생일이라고, 만난 지 n년째라고, 결혼기념일이라고, 퇴근길에 “그냥 자기한테 꽃 선물한 지 오래된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화사한 꽃다발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당신에게 안겼다.


내일은 입춘이자 당신 생일이다. 봄처럼 화사한 꽃 한 다발과 당신이 좋아하던 녹차와 초코 조각케이크를 각각 사서 당신에게 가기로 했다. 집 근처 꽃집을 검색하다가 깨달았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날에조차 나에게 꽃을 사주던 사람이었는데, 나는 당신이 죽어서야 꽃을 사다 바친다는 사실을. 좀더 표현하고 아껴주었어야 했는데. 후회는 언제나 한 걸음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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