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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18. 2021

당신이 치커리 맛을 알아?

쓴 맛을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그 달콤함을

나를 소개할 때 왕년에 방송작가를 했었노라고 말하면 으레 ‘멋있다!’는 답이 되돌아온다. 그 순간엔 으쓱하며 좋아하지만 잠시 후 쓸개가 반응을 한다. 쓰린 물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과거를 들추어내고 곧 자괴감에 빠진다. 자괴감은 한번 모습을 드러내면 쉬이 물러나질 않고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다.


‘하긴 했지만 안 하기도 했지. 하지만 다시 하긴 했…’


그렇게 점점 나를 끌어내려 결국  해고의 날을 기억해 낸다. 이어서 해고보다   맛을 보게   해까지 보란 듯이 들쑤신다. 


다행인 건 쓴 맛이 쓴 맛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방송작가로 일하는 10여 년의 시간 동안 여러 번 고비를 맞이했고, 실제로 여러 번 그 일을 그만두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송가로 슬금슬금 기어들어가긴 했지만 처음 그 일을 그만두면서는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크게 상처 받았다.


처음 방송가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건 어이없는 사건을 겪게 돼서였다. 적은 분량의 원고이긴 하지만 그만큼의 원고나마 쓰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전까지는 막내작가로 온갖 잡일을 하며 월세도 못 낼 만큼의 페이를 받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했다.


처음 K본부의 일을 시작했을 때, 한 달 페이는 60만 원이었다. 이 금액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그 후 케이블 TV에서는 월 45만 원을 받으면서 점심, 저녁까지 사 먹었다. 그야말로 교통비와 밥값을 간신히 충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가장 최악이었던 건 3개월 일하고 60만 원을 받았을 때였다. 월 급여로 계산하면 20만 원이었다. 막내작가에게 줄 페이 책정이 안 되어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 60만 원도 메인작가가 자기 원고료에서 일부 떼어준 돈이었다.


그 당시엔 신세 지며 사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모아 놓은 돈도, 모을 돈도, 누군가 도와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선배 집에서, 인천 사는 작은 언니 집에서, 성남 사는 사촌 오빠 집에서 출퇴근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매일매일이 미안하고 서럽고 우울했다. 경력을 쌓아야 원고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돈을 받아가면서도 3년을 버텼다.


3년 만에 드디어 원고를 쓰게 됐다. 서브작가로 '입봉'을 한 것이다. 입봉 했다고 해도 주당 페이가 30만 원이었으니 그동안 빚진 세월을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래도 원고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몸 바쳐서 일했다. 3년간은 몰랐던 출근할 때의 즐거움과 녹화할 때의 뿌듯함, 방송 후 스크롤에 내 이름이 오를 때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원고를 쓴 지 1년 만에 방송가에서 내몰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K본부의 아침 프로그램을 할 때였는데, 외주제작사의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소문난 사이코였다. 그 제작사에서 일하는 한 피디가 본부장의 집에 갔다가 본부장이 키우는 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우리는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난 본부장에게 크게 피해를 본 일이 없어서 그 말이 크게 와닿진 않았는데,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이다.


어느 날 출근해서 받은 한 장의 종이가 인생을 뒤흔들었다. 내가 원고를 쓰던 코너에 다른 작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직접 섭외하고 촬영을 진행했던 코너를 하루아침에 다른 작가에게 넘긴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서 그 이유를 물어봤다. 이유는 더 가관이었다. 메인작가가 바뀌었기 때문이란다. 메인 작가도 하루아침에 바꾸고 서브 작가까지 몽땅 갈아치운 것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팀은 어이없는 해고를 당하고 짐 챙길 새도 없이 회사를 나갔다. 아니 쫓겨났다.


프로그램이 종영된 것도 아니고 시청률이 안 나온 것도 아닌데 해고된 이유는 단 하나! 본부장이 비위를 잘 맞추는 새 메인작가를 쓰고 싶어서 오래전부터 작당을 한 것이다.


입봉 1 만에 해고라니이런 말도  되는 시스템과 사람들 안에서 계속 일해야 하나?’


팀장이 케이블 TV에 자리가 하나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괜한 오기와 자존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결국 방송작가로 일한 지 4년 만에 그 일을 (잠시) 버렸다!  




일을 버리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새 직장을 알아보려면 준비가 필요한데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이 바쁘게 살았기 때문이다. 요양하는 기분으로 고향집에 내려갔다. 당시 부모님은 오빠와 함께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었고 일손이 부족하던 차여서 굉장히 반겨주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 먹지 못했던 고기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게 가장 맘에 들었다. 내려가자마자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게 됐을 때도 불만은 없었는데... 일주일 만에 고향에 내려간 걸 후회했다.


방송작가 4년 고생을 다 합쳐도 식당에서 일하는 일주일만큼 힘들진 않았던 것 같다. 그동안의 설움과 굴욕은 식당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사소함이었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6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2시간을 고기 타는 연기 속에서 현실인지 악몽인지 헷갈려하다가 꾸역꾸역 아침을 먹는다.
2시간을 치우고 나면 다시 점심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1시간 동안 찌개 끓는 연기를 헤쳐 다니다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점심을 먹는다.
저녁 손님 준비하느라 오후 시간을 다 보내고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무려 밤 10시!
씻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잘해야 11시, 대부분 자정이다.
다시 반복에 반복! 일요일? 없다. 정기휴일? 없다.
아니, 있다. 명절에는 쉬니까 1년에 정기휴일 이틀.


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색할 시간이 전혀 허락되지 않는 바쁜 일상. 오로지 손님 맞느라 정신을 쏙 빼고 나머지 시간엔 육체적인 고통으로 힘겨울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난 후 난생처음 보약이라는 걸 지어먹었다. 몸 구석구석이 아프고 기운이 쏙 빠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역인 일을 부모님과 오빠는 4년째 하고 있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집을 뛰쳐나가서 겨우 한번 해고됐다고 홀랑 다 버리고 온 막내딸이, 막내 동생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다행히 보약이 원기를 회복시켰고, 난 반성하는 의미로 열심히 일했다. 마음 한 구석에 바람이 숭숭 지나다니긴 했다. 좀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고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식당에서 일하며 1년이 지났다. 어느 정도 몸에 익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저 하루하루의 반복일 뿐 나아지는 건 없었다. 28세의 젊디 젊은 나이에 어느 시골의 이름도 모르는 식당에서 일하다 생을 마감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살 순 없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고 피로는 배가 됐다.


'다시 방송가로 돌아가야겠다. 여기서 죽느니 거기서 욕보는  낫지 않을까?'


이런저런 고민과 잡념들로 하얀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잠은 잠대로 못 자고 일은 일대로 바쁘다 보니 또다시 몸에 고장이 났다. 2명의 손님이 4명 때로는 6명으로 보이고, 반찬 놓은 자리에 또 반찬을 올려놓고, 방바닥을 닦다가 상에 부딪히고, 잠시 쉰다고 누우면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어지럼증을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았다. 빈혈이라고 했다. 과도한 육체피로에 잠까지 못 자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6개월치의 약 처방을 받고 더욱더 결심을 굳혔다. 여기를 떠나야겠다고!


가족들 몰래 작가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쪽 사정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일을 구하기가 수월하지만 이미 1년을 쉬었고, 게다가 입봉 한 지 1년 만에 뛰쳐나왔으니 적당한 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고민거리만 잔뜩 짊어진 채 맞이하게 된 정기휴일 아침. 아침 장사만 하고 쉬기로 한 추석 명절이었다. 명절인데도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 온 몸에 땀이 다 밸 정도였다. 엄마는 장사도 잘 됐고, 명절이고 하니 특별 외식을 하자고 하셨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쉬는 게 더 절실했기 때문에 시큰둥했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집 앞마당에 숯불이 타고 있고 그 숯불에 구워 먹을 고기가 다름 아닌 한우 꽃등심이었다. 모른 척 쉰다고 하기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고기가 스멀스멀 익어가고 있을 무렵, 근처에 사시는 둘째 외숙모가 샐러드를 가져오셨다. 샐러드라는 말에 반가워서 보니 양재기에 치커리가 잔뜩 담겨 있었다. 치커리라면 씁쓸하고 거칠거칠한 채소로 상추와 함께 고기를 싸 먹어만 봤지 샐러드로 먹어 본 적은 없었다. 맛이 그다지 기대되지는 않았지만 방금 밭에서 딴 채소로 만든 샐러드이니 싱싱하긴 하겠다고 생각했다.


안개가 자욱하더니 이내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만은 이슬비가 참 시원하고 반가웠다. 고기가 익기 시작하면서 젓가락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치커리 샐러드를 시식할 차례가 되었다.


다진 마늘과 약간의 식초와 설탕으로만 버무린 치커리 샐러드는 어쩜 그렇게 씁쓸한지, 그런데 신기한 건 그 후에 따라오는 달콤함이었다. 어떻게 쓴데 달 수가 있지? 물론 설탕이 들어갔으니 달겠지만, 쓰면서 단 그 맛이 일을 하며 알게 된 묘한 조합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힘들수록 고기 맛은 꿀맛이었으니까.


큰 양재기의 샐러드가 순식간에 바닥났다. 외숙모는 다시 한번 밭으로 가서 치커리를 따고, 2차 샐러드를 버무려 오셨다. 우리는 또 한 번 바닥까지 싹쓸이했다.


하늘이 뿌옇게 내려앉은 마당에 앉아 숯불고기에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치커리 샐러드를 곁들여 먹고 있는 식구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 후 막내딸의 간곡한 요청으로 매주 일요일이 휴일로 지정됐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숯불을 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가로 복귀했다. 식당 종업원으로 쓴 맛을 보고 나니 방송작가의 삶은 그다지 쓰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 젖어 살다보니 또 뱉어버리고 싶을 만큼 씁쓸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떠올렸다.


자는 시간이 유일한 휴식 시간인 부모님을, 치커리 샐러드의 쌉쌀 달콤한 맛을.
그러면 버틸만했다. 식당에서든 방송가에서든 어디서든 쓰고 단 맛은 공존하니까. 아니, 쓴 맛을 봐야 단 맛이 더 달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걸 알고 나니 쓴 걸 바로 뱉어버리지 않고 머금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 / 구글 이미지 : 오아시스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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