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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이라는 처방이 필요한 당신에게 권하는 선택지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by 다시봄

살면서 각성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각성을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데 정말 그럴까?


거창한 걸 생각한다면 각성하기는 어렵고 나와 상관없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각성은 우리 곁에 늘 머물러 있다가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각성을 하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나는 매일 각성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드라마 <소년시대>의 찌질이 병태는 싸움짱 경태에게 복수하기 위해 싸움을 배우러 갔다가 지영에게 억지로 떠밀려 숯가마에서 일하게 된다. 힘들기도 하고 자기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운 병태는 도망을 시도하는데… 담장을 넘다가 문득 불법 댄스교습소를 운영하다 (경태의 신고로) 걸려 유치장에 갇혀 있는 아빠와 평생 힘도 빽도 없는 아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뼈 빠지게 일한 불쌍한 엄마가 떠오른다.

‘겨우 이런 작은 일도 못하면서 그 큰 복수를 어떻게 한다는겨?‘

각성을 한 병태는 담장을 내려와 다시금 각오를 다진다. 그렇게 버티고 버틴 끝에 싸우기 위한 눈빛을 장착하고 돌아와, 실전 복수 훈련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인물에게 반전의 순간은 각성할 때 온다.

각성은 정신을 차리는 것,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각성을 하기 위해서는 큰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각성은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거창한 깨달음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이유를 찾고 선택했을 때의 이익을 따지며 여러 조건과 환경을 비교한 후 최종 선택을 한다. 선택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지만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회로가 돌아가며 얽혀 있는 것이다.


선택의 과정을 말하는 이유는 선택하는 과정에서 각성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을 죽 늘어놓고 비교하다 보면 ‘내가 왜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명확하게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다. 그 떠오름은 단순한 생각의 부유가 아니라 각성의 전조다. 그 선택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다. 잊고 있었던 선택의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매 순간 인식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선택을 할 때만큼은 떠오름 -> 각성 -> 선택 -> 변화의 과정을 글로 옮기면 ‘아하!’하며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이른 아침마다 힘겹게 눈을 비비고 일어나 글을 쓰기로 다짐했을 때 난 그 선택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왜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작가가 되려면 막연한 꿈이 아닌 생생한 현실로 살아야 하니까(떠오름) -> 매일 쓰지도 않으면서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각성) -> 이제부터 매일 쓰자(선택) -> 머리가 맑아지는 아침마다 글을 쓴다(변화)


글로 써서 보면 약간 유치하기도 하지만 내가 선택한 하루에 대한 확실한 이유를 알게 된다. 이유를 알면 머릿속에 각인이 되고 각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매일 각성하는 나는
매일 변화하고 매일 성장한다.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는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있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가?

하루가 어떻게 왔다 가는지 정신없이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각성이라는 처방이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각성을 찾아 헤맬 때가 온 것이다. 각성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인지할 시간이 코앞에 있는 것이다.


선택의 이유를 떠올리고 각성하고 변화하기만 하면 된다. 참 쉽지 않은가? 참 고맙지 않은가?

글을 쓰면서 알게 되는 생각의 요소들과 구조와 변화 과정. 선택의 과정에 자리하고 있는 각성이라는 선물. 이걸 알면서도 써먹지 않는다면 얼마나 아까운가? 선택지의 답을 쥐어줘도 모른 척할 것인가?






[지금 연재 중입니다]

월 : 어른의 Why?

화 : 일주일에 한번 부모님과 여행갑니다

수 : 어른의 Why?

목 :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금 :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사ㄹㅁ

토 : 어른의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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