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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Nov 19. 2021

산티아고에 연애하러 갔어요?

그럴지도 모른다

한 번도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다.

한 번도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키가 커서 어딜 가나 눈에 띄는 게 불만이다.

무뚝뚝하고 꽤 이성적인 편이라 그걸 감추려고(?) 타인 앞에서 잘 웃고 친절하게 대한다.


스스로 느끼는 단점과는 달리 ‘제 눈에 안경’이라고 나를 이성으로 좋아해 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짝꿍으로 찜꽁한 사람과는 오래 연애를 했고 그 사람에게 헌신했다.


그래서일까?

만나던 사람과의 원치 않는 이별은 그와의 이별이 아니라 세상과 이별하듯 엄청난 후폭풍이 밀려왔다. 스스로 감당하기 버거워질 때까지 ‘내 탓이오!’를 외치다가 온갖 비관론을 펼쳐 논다.


‘또다시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을까? 연애는 끝났어.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을 거야. 이번 생은 망했어.’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갔다. 마지막 연인과의 이별 후 도망간 곳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었다.




그곳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었기 때문일까?

나를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상처 받았다고 티 내도, 티 내지 않아도 누구도 그 마음을 모르는 곳.


그곳까지 가서 나를 감출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나도 몰랐던 진심이, 본능이 툭툭 튀어나왔다.


‘상처 받은 영혼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싶었나? 그래야만 한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나? 누가 나를 안 사랑하고 배겨?라는 오기가 생겼나?’


진짜 마음이 어떤지도 모른 채 그때그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산티아고로 가는 끝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수많은 생각을 했고, 수많은 나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스스로를 잘도 속이며 살았네. 내 속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실연의 아픔도 극복하지 못해 도망 다니는 약하디 약한 영혼 같으니라고.



진짜 나를 만나게 되면 처음엔 당혹스러워 거부하다가 점차 그 모습을 인정하고 수긍해야 하는 아픔의 단계를 거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수준(?)까지 가게 된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건 로맨스 짝꿍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나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준 '진짜' 사랑.

알고 보니 더 찌질하고 더 진상인 나를 대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나눠준 사랑꾼들.

사랑을 떠나보내고 진짜 사랑을 배우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을 지금도 걷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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