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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좋은 글이 써지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2

by 다시봄

꿈을 자주 꾸고 그 꿈에서 영감을 받곤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요즘 내 꿈은 온통 글쓰기에 대한 고민뿐이다.

매일 쓰는 글이 내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나? 쓸거리가 벌써 바닥나 조바심이 났나?

잠에서 깨면 ‘오늘은 뭘 쓰지?’ 고민이 이어진다.


글을 쓰는 테이블의 노트북 앞에는 병풍처럼 책들이 담을 쌓고 있다.

글을 쓰기 전 병풍에 적힌 제목들을 쭉 훑다 보면 오늘 써야 할 글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멍하고 책을 뒤적여도 눈에 드는 문장이 없다.


큰일 났다. 어떡하지?




며칠 전 <유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박찬욱 영화감독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취향은 아니지만 옆집에 사는 숨은 고수 느낌의 외모와 영화에 대한 장인정신, 예술에 대한 사랑만큼은 인정해 왔다. 특히 클래식 마니아인 그가 클래식 공연장에 자주 온다는 소문을 들었었는데 올해 6월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리사이틀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신작으로 선보이는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홍보하기 위해 나온 토크쇼였지만 홍보를 떠나 그가 얼마나 집요하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인지 한 편의 인물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 영화를 만들기 위해 15년 전에 원작 소설 <도끼>의 판권을 계약했고, 그 이전에 이미 각색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주연배우인 이병헌과 만난 자리에서 이 영화에 꼭 출연하고 싶다는 그에게 “빨리 나이 들어라.”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영화의 주인공이 25년간 다닌 회사에서 정리해고 되는 중년의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나리오가 무르익고 이병헌이 나이 들기를 기다려 15년 만에 드디어 개봉을 하게 된 것이다.


영화를 아직 보진 않았지만 15년간 숙성시킨 그의 인내심만으로도 한껏 기대가 된다.

작가이며 감독인 그가 얼마나 그 영화에 많은 공을 들였을지,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들었을지, 얼마나 인내하며 밀도 있게 그려냈을지 보지 않았는데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참 영화 시나리오 쓰는데 몰두했던 20여 년 전의 시나리오를 꺼내봤다.

참 하찮고 정교함이 떨어지고 긴장감이 없는 대본이지만 신인만이 가진 ‘날 것’은 살아있었다. 그 시나리오 중 하나를 지금까지 파고 또 팠다면, 숙성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면 나도 박찬욱 감독 같은 작가가 되었을까? 나의 집요함과 인내심이 그에 미치지 못해 어쩌면 훨훨 날 수도 있었던 원작 시나리오를 창고에 가두게 한 건 아닐까?


매일 좋은 글이 써지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글이 써지지 않고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탓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사람으로 남으려면 오늘도 써야 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매일 글을 쓰는 일이 5개월차에 접어들었다.

글이 내게 주는 많은 좋은 것들을 나열하고 새겨두고 반복하여 기억해도, 써지지 않는 날엔 나를 감옥에라도 가두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런 유혹도 아무런 방해도 없이 오로지 글만 쓸 수 있는 감옥에 가두면 뭐라도 써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하지만 일상을 버릴 수 없는 나는 오늘은 출근해야 하고, 내일은 형부의 텃밭에서 땅콩을 추수해야 하고, 모레는 부모님을 만나야 한다.

해야 하는 일과 함께 하는 일상과 나란히 걸어가야 하는 글쓰기를 내려놓을 게 아니라면 뭐라도 써야지 어쩌겠는가.


나는 오늘도 쓴다.

끌리는 이야기, 유혹하는 이야기가 아니어도 쓴다.

써지지 않는 글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도 작가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까 ‘어쩔 수가 없다’.







[지금 연재 중입니다]

월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2]

화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2]

수 [오늘보다 행복한 날은 없는 것처럼]

목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2]

금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2]

토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2]

일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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