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2
제가 신발에만 깔창을 깔고 지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부터 제 마음속에도
깔창을 깐 것처럼
센 척하고, 잘난 척하고, 강한 척하며
저 자신을 속인 것 같아요.
뇌부자들, <어떤지, 도망치고 싶더라니>
생애 초기에 ‘대단한 나’를 그대로 비추며 공감해 줄 거울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이 지나도 자기애는 성숙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과대한 자신감을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에 못나게 비치는 건 아닌지 자꾸만 의심을 합니다.
내게도 오래된 숨겨진 얼굴이 있다.
‘자신이 없어서, 못나게 보일까 봐’ 자꾸만 괜찮은 사람처럼 구는 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자리에서도 강한 척, 센 척하는 나를 보면 나조차 당황했다.
‘나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을까?
왜 나 자신을 못 믿어서 이렇게까지 척을 해야 할까?’
스스로를 덜 사랑한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속상했고,
그걸 감추려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나는 못난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최선이 ‘척’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늘 무언가를 해내고, 이겨내는 사람으로 보여야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무를 거라 믿었다.
나는 깔창을 깔지 않아도 되는 키였지만, 그만큼 높은 시선 속에서 하찮은 나를 들킬까 두려웠다.
이 말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이어야,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척’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면 나는 도망쳤다. 이겨내는 척이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도망만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내가 깔창을 벗게 된 건 마지막 연인이었던 그가 떠난 이후였다.
그를 믿었기에 나는 나의 밑천을 다 보여주었다.
강한 척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약한 나를 보여준 순간, 그는 미련 없이 떠났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내가 나를 속이며 산 것이 결국 남을 속이는 일이었다는 걸.
처음부터 강한 척을 하지 않았다면 그가 떠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약한 사람이라는 걸 처음부터 보여줬다면 우린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이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척’하지 않으려, 약힌 모습도 나라는 걸 인정하려 노력하고 있다.
제가 신발에만 깔창을 깔고 지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부터 제 마음속에도
깔창을 깐 것처럼
센 척하고, 잘난 척하고, 강한 척하며
저 자신을 속인 것 같아요.
나는 앞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려 한다.
그 모습을 단단히 하려 애쓰고 있다.
그것만이 진짜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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