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과 여행 갑니다
김장철이 다가오는데 올해 우리 가족에게는 이상한 평화가 찾아왔다.
매년 부모님 텃밭에서 배추를 뽑는 일부터 시작하던 김장이지만, 엄마가 무릎 수술을 하면서 올해는 단 한 포기의 배추도 심지 않았다.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절인 배추를 사서 속만 버무리는 초간단 김장을 하기로 했고, 네 남매는 그 소식에 서로 하이파이브까지 했다.
그 평화는 큰형부가 등장하면서 산산이 부서졌지만…
형부는 두 달 전 엄마한테 땅콩 60kg의 유통과 판매를 맡기더니 이번엔 배추 200포기를 들고 왔다.
올해 배추 농사가 너무 잘 돼서 “남 주긴 아깝다”며 우리 김장을 위해 투입하겠다고 했다.
형부네 밭은 대체 뭐가 그렇게 잘 되길래 매번 ‘농사 대박’이 터지는 걸까.
배추는 형부가 뽑아다 주겠다고 하니 엄마는 덥석 OK. 우리는 꼼짝없이 두 손 두 발 아니, 허리까지 굽혀 항복해야 했다.
“하루 만에 김장 끝!”을 외치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형부의 유기농 배추와 엄마의 결정을 거스르지 못해 우리는 결국 배추 손질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주말 날씨는 따뜻했다.
형부가 새벽부터 뽑아 온 배추는 부모님 집 마당을 거의 배추 창고 수준으로 채웠다. 보통 120포기 정도 하는데 올해는 형부의 사랑(?)과 수고 덕분에 200포기 김장을 하게 된 것이다.
아침 9시, 가족이 총출동했다.
수돗가에서 4명이 배추를 절이는데 동원되고, 배추 다듬는 사람 2명, 일륜차로 심부름하는 사람 1명이 배치됐다. 이 정도면 거의 가족형 ‘김장 프로덕션’이다.
우리는 하하호호 웃으며 일을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이걸 오늘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살짝 섞여 있었다.
배추를 다 절인 후, 무를 뽑아 채 썰고, 갓 다듬고, 파까지 종종 썰고 나니 어느새 오후 4시.
김장을 하다 보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건 시간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다음 날 아침 8시부터 절인 배추를 씻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김장의 하이라이트인 버무리기를 위해 올케언니와 사촌 동생까지 합류해 총 9명으로 팀이 확장됐다.
총감독은 물론 엄마다.
양념 비율, 재료 동선, 인력 배치까지 엄마는 거의 김장계의 봉준호 감독이었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새로운 김장 꿀팁을 발표하셨다.
“올해 김치에는 꿀을 넣는다.”
순간 가족들은 서로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래서 꿀팁인가?”
이 유치한 농담이 이상하게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들 기세 좋게 꿀을 퍼 넣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배추 속 맛이 정말 꿀맛이었다.
엄마의 김치 연구는 언제나 믿고 따를 만하다. 유튜브와 지인 정보로 무장한 엄마의 데이터베이스는 거의 김치 GPT 수준이다.
이웃 아줌마는 우리 대가족의 김장 현장을 보며 “부럽다”를 연발했다. 그러더니 커피까지 타다 주시며 “이런 가족 어디 없다”고 감탄했다.
커피로 잠시 멈춘 손의 떨림을 안정시키며 엄마를 보았는데, 엄마는 우리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올해도 와줘서 고맙다. 엄마가 아파서 김장 못할까 걱정했는데… 고마워.”
그 순간 우리도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의 말 한 마디가, 존재 자체가, 함께 하는 시간이 모두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김장이란 게 그냥 김치만 담그는 일이 아니라는 걸 또 한 번 느끼게 되는.
12시에 김장을 끝내고, 따끈한 수육에 막걸리를 한잔씩 하며 올해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특히 김치냉장고에서 숙성시킨 문경 산 막걸리는 우리 가족의 공식 ‘김장 엔딩 크레딧’ 같은 존재다.
맛이 기가 막히고, 그 맛에 허리 통증도 잠시 잊을 수 있는, 없어서는 안 될 막걸리 엔딩.
내년에도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배추를 절이고, 새로운 꿀팁을 전수받고, 막걸리를 나눌 수 있을까?
부모님과 함께하는 이 김장을 오래오래 맛볼 수 있을까?
이번 김장의 꿀팁은
아픈 엄마와 함께 한 꿀 같은 시간, 김치에 꿀맛을 더한 진짜 꿀, 그리고 투덜대긴 했지만 형부가 농사 지은 꿀만큼 단 배추다.
올해 김장은 힘들었지만 꿀팁 덕에 고맙고 꿀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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