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과 여행 갑니다
가끔은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부모님을 이렇게 오래 보아 왔는데 나는 정작 두 분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안다’고 쉽게 단정해버린 건 아닐까.
익숙함이 만들어낸 착각이 오래된 편안함 뒤에 숨어 있었던 건 아닌지 문득문득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내가 추천한 식당에서 엄마아빠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인터넷에서 찾아 본 곳이었고 리뷰도 좋은 생선구이집이었다. 두 분이 좋아하실 것 같아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음식이 나오고 몇 술 뜬 뒤에 엄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선이 간이 하나도 안 맞네.”
곧이어 아빠도 말했다.
“밥은 너무 질어. 여기 두 번은 안 오겠다.”
그 순간 마음 한켠이 조용히 주저앉았다.
내가 괜히 여기로 모시고 온 건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밀려왔다. 고르고 고른 식당이었기에 왠지 내가 평가받은 느낌까지 들었다. 투덜대는 두 분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냥 기분 좋게 “괜찮네, 잘 먹었다” 한마디만 해 주면 안 되는 걸까. 그렇게 말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마음속에서 서운함이 스르르 굴러다녔다.
하지만 그 서운함은 잠깐 머무르다 이내 다른 생각으로 묻혔다.
‘나도 평소에 그러지 않았나?’
맛이 조금만 없어도 익숙한 엄마 앞에서 툭툭 말을 쏟아내던 어린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두 분도 막내딸에게만큼은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불편한 건 불편하다 말해도 된다고, 그냥 그대로 표현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신 건 아닐까 하고.
그 생각이 스치자 내 마음에 돌처럼 놓여 있던 서운함이 풀려내려갔다.
‘아, 내가 편하니까 그러셨겠구나.’
그렇게 이해하니 두 분의 투정이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부모님을 알고 산 세월이 50년이 되어간다.
어릴 땐 아무 것도 몰랐다 해도 이삼십년을 본 사이다. 하지만 그 ‘오래’가 ‘깊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천천히 깨닫는다.
아빠는 요즘 무엇을 걱정하며 잠드는지, 엄마는 어떤 순간에 마음이 상하는지 정말 알고 있었던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마음들이 두 분에게도 있었을 거라는 걸 나는 왜 이제야 생각하게 된 걸까.
어린 시절엔 부모님이 모든 걸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두 분도 불안해하고 외로워하고 때로는 마음속 깊은 데서 작은 한숨을 쉬는 그런 ‘한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부모님의 젊은 날을 거의 모른다.
스무살의 엄마가 무엇을 꿈꿨는지, 서른의 아빠는 어떤 미래를 그렸는지 알아본 적이 있었던가.
엄마는 어떤 음악을 좋아했을까.
아빠는 어떤 계절을 가장 아꼈을까.
그때의 두 분은 지금의 부모님과는 또 다른 얼굴을 분명 가지고 계셨을 텐데 나는 그 얼굴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이 부모님이기 이전의 그 한 사람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질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라도 작지만 진심을 담은 질문을 던진다.
“요즘 어떤 게 제일 좋으세요?”
“그때는 어떤 꿈이 있으셨어요?”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일도 있어요?”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비슷하고 식탁 위 반찬도 함께 걷는 길도 같다. 하지만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두 분의 말이 이전보다 더 가까이 들리고 내 마음도 이전보다 더 부드럽게 열리는 듯하다.
아직 모르는 게 많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부모님을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 더 많이 이해하고 싶고 더 많이 들여다보고 싶다.
서운함이 찾아오는 순간에도 투정이 들려오는 순간에도 그 안에 숨어 있는 두 분의 진짜 마음을 놓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연재 중입니다]
월 [덕분에, 살았습니다]
화 [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과 여행 갑니다]
수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목 [덕분에, 살았습니다]
금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일 [이 사람 어때? AI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