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해 본 명상이 자애명상이었다.
책을 읽다가 본 자애명상은 일단 쉬워서 혼자서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향해 자애문구를 되뇌고 점차 그 대상을 넓혀나가며 자애의 마음을 일으킨다. 그게 다였다.
이 간단한 명상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약간의 의구심과 함께 책에 쓰여있던 여러 자애문구 중 세 개 정도를 골랐다.
반가부좌를 틀고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후 속으로 읊조렸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자유롭기를.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를.
턱- 마음이 걸려 넘어진다. 눈으로 볼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속으로 되뇌는 건 사뭇 다르다. 나는 한 번도 나의 안녕을 소리 내 말한 적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 적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타인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에 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너무 관성적이라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정한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면 스스로를 타박하고 끝내 믿지 못하는 나....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이후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꾸준히 자애명상을 했다. 새살이 돋으려면 시간이 걸릴 테지만 나를 사랑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 그 자체로 힘이 있었다.
나중에 자애명상을 제대로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이 명상은 단지 마음을 위로하는 수행이 아니었다.
자애는 집착 없이 좋아하는 마음이다. 그 대상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며 바라는 바 없어 맑고 청량한 마음이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자애명상은 이후 존경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중립의 사람으로 대상을 옮겨 자애의 마음을 계발한다. 그리고 나중엔 싫어하는 사람, 마지막엔 모든 존재로까지 자애의 마음을 일으킨다. 대상들에 대한 차별심이 사라지고 동등한 자애의 마음이 일어날 때 '한계를 부쉈다'라고 한다. 결국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좋고 싫은 사람의 경계를 허문다.
요즘도 108배를 하고 난 후, 아침 명상의 마무리를 자애명상으로 한다. '모든 존재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안전하고 평온하기를' 이 같은 자애구절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미세하지만 매일 조금씩 그런 마음이 자란다.
하던 사업을 마무리할 시점, 다이닝바의 오너셰프인 지인이 주말에 와서 와인이나 따달라는 농담 같은 제안을 했다. 와인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지만 마침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아 그러겠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명상을 막 시작한 상태였는데, 두 일은 묘하게 맞물려 시너지를 냈다. 아침에 자애명상을 한 나는 스스로에게 너그러웠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빙긋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다. 소위 진상이라 부를 수 있는 상대의 행동에도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었다.
이런 마음 덕분일까. 내가 짓는 표정에, 건네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감정과 보내는 시간이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고맙다고 말했고 나를 찾는 사람들도 생겼다. 고객과 접점이 별로 없던 디자이너 일과는 다르게 즉각적인 자기 효용감이 있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작은 변화들이 차곡차곡 쌓여 관계가 되었다. 거기서 가까워진 스위스 커플과는 여전히 연락을 하고, 400년은 훌쩍 넘었다는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동네엔 와이너리와 포도밭이 가득했는데 두 번째 방문은 포도 수확 시기에 맞춰 며칠간 그곳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지상낙원 같던 그곳, 동네 호수에서 수영을 하면서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생각했었다. 명상과 불교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기도 했지만 내가 그들을 위해 만든 영어 메뉴판이 시작이었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 먼저 나에게 보냈던 자애문구가 발단은 아니었을지. 내가 먼저 풀어놓은 경계가, 내가 먼저 건넨 안녕이,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간 것이다.
마음은 안에서 시작되지만, 그 끝은 늘 바깥과 닿아 있다.
아침마다 읊조리는 자애문구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든 지는 모르겠다.
다만 조금 덜 구분 짓고, 조금 더 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애는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연습임을, 확장되는 마음을 보고 깨닫는다.
*매주 수요일,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