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을 해왔는데, 내가 명상을 제대로 하고 있구나 체감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이걸로 명상을 했다고 말해도 되나 싶은 날들이 더 많았다. 몰려오는 졸음으로 겨우겨우 앉아있던 날, 전날의 술기운으로 앉아있는 것 자체로 괴로운 날, 쏟아지는 망상으로 꽉 채웠던 날....
108배와 함께 해왔으니 망정이지, 명상만 했다면 1000일을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고 보니 되든 안되든 매일 그냥 그 자리에 앉는 것부터가 수행이긴 했다.
지도자과정에서 명상 관련 교학을 제대로 배우고 공부하면서 머릿속에 초기불교 명상의 체계가 생겼다. 명상의 종류부터 명상을 할 때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고, 뭘 경험해야 하는지 안다는 것은 나의 명상 수행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이끌었다. 특히 위빠사나 명상을 하게 되면서 그동안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던 불법이 내 삶으로 더 가까이 들어왔다. 계정혜, 삼학*이 함께 가야 한다더니 그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초기불교 명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마타(집중) 명상과 위빠사나(관찰) 명상
사마타 명상은 말 그대로 한 대상에 집중해 마음 챙기는 명상이다. 집중명상은 불교가 아니더라도 여러 종교 혹은 문화권에 존재한다. 그에 반해 위빠사나 명상은 불교 고유의 명상법이라 할 수 있다. 관찰대상은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굳이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괴로울 때 위빠사나 수행이 정말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호흡을 주제로 삼아 집중명상을 해왔지만 정작 신경 쓰이거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땐 그 생각을 제쳐놓고 집중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생각의 파도가 머릿속이 뒤덮였는데 어찌 호흡만 볼까. 나중에 위빠사나를 배우고 나서는 그런 상황에선 올라오는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관찰하는 마음관찰명상을 했다.
그 마음이 올라오는 원인을 보고 거기 반응하는 내 감정을 영화관 스크린을 보듯 일어나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감정 자체가 내가 아님을 알게 된다. 감정이나 생각에 대한 판단 역시 내가 살면서 쌓아온 관념을 사실처럼 받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낱낱이 파헤치고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점차 거리를 둘 수 있었고 많은 것들이 가벼워졌다.
일을 하다 보면 잘 맞는 클라이언트를 만나기도 하지만 너무 달라서 힘든 상대들도 종종 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거나 너무 다른 상식을 가진 그들에게 머리채를 잡혀서 이리저리 끌려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그에 반응하는 내 마음은 어떠한지, 그 마음 아래에 있는 내 업식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조용히 눈감고 앉아 관찰했다. 보다 보면 정작 큰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만두면 될 일이었다. 거기다 대고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 나를 화나게 만들려고 한다' 등의 근거 없는 판단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꾸준히, 계속 수행하다 보면 그 어떤 감각도, 느낌도, 생각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조건이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 생각은 머물지 않고 느낌은 유지되지 않으며 감각 역시 계속 바뀐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이다.
그리고 생각은 내가 원할 때 생기지 않고, 원할 때 멈추지도 않는다. 내가 생각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나를 덮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감각이 일어날 때 바로 따라붙는 '느낌'도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 과정 어디에서도 지휘하고 명령하는 고정된 주체가 없다는 것. 그 무엇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절절히 경험하게 된다. 나라고 집착할 만한 게 없다는 것, '무아'이다.
불교대학에서 배웠던 무상과 무아. 그 배움만으로도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그 개념이 이해가 아닌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변하는 것을 붙잡기 시작하면 괴로움이 시작되고 고정불변의 내가 있다는 생각은 나를 더 괴롭게 만들 뿐이라는 것.
꾸준히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 보니 일상에서도 수시로 알아차림의 순간을 맞을 수 있었다.
아, 지금 내가 불안해하는구나, 이 불안에 실체가 있나.
화가 올라오네, 왜 화가 올라올까, 이전의 경험으로 내가 이런 판단을 하는구나 등등.
그야말로 모든 게 수행거리가 되었다.
*계정혜(戒定慧): 불교 수행의 세 축으로, 계는 몸과 말을 바르게 하는 삶의 태도, 정은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안정시키는 힘, 혜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지혜를 뜻한다.
삼학(三學): 계·정·혜를 함께 닦는 불교의 기본 수행 체계로, 어느 하나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서로를 돕고 깊게 만든다.
*매주 수요일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