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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Nov 10. 2020

13. 반짝반짝 빛나는 은인을 만나다.

오후 3시가 넘어 4시에 가까운 시간, 반짝반짝 이마가 빛나는 호리호리한 의사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제가 내일 수술을 담당하는 ㅈㅎ입니다. 마음고생 많으셨죠? 죄송합니다. 저희 측의 불찰입니다. 마음 푸세요. 제가 영상 자료도 보고 여성병원 원장님과도 얘기도 나눴습니다. 내일 아침 첫 수술로 들어갈 계획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 빛나는 이마와 더불어 몸 뒤에서 아우라가 비치는 듯했다. 나는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다. 이 분은 나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비뇨기 의학과 선생님께서 병실을 나가신 후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완전 믿음이 가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다고 얘기했다. 우리 남편은 얼굴만 보고 어찌 아냐고 얘기했지만 뭔가 느낌이 그랬다. 비뇨기 의학과 선생님은 겸손하고 실력 있는 분 같았고 협진해 주시는 산부인과 선생님은 자만이 아닌 진짜 자신감을 가진 전문가 같았기에, 진짜 어떤 분이시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좀 시간이 지나자 간호사 선생님이 다가와 내일 수술을 위해 두꺼운 링거 바늘로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꽂았던 곳 혈관이 터져있어 새로 바늘 꽂는 곳을 찾는데 아주 어여쁘신 간호사 선생님께서 오른팔 두 방, 왼팔 한 방을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만드시더니


혈관이 너무 약하세요. 잘 안 잡히네요.


이렇게 얘기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가 잘못 꽂아 여러 번 아프고 멍들게 하고선 도리어 내게 짜증을 내니 분명 이 선생님께 화가 나야 하는데 전혀 화가 나질 않았다. 나는 오늘 반짝반짝 빛나는 구세주를 만났고 희망이 생겼으니까. ^^ 나는 괜찮으니 맘껏 찌르시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 짜증을 부리던 환자가 갑자기 포근한 봄 날씨처럼 관대해지다니. 웬 변덕인가 싶었을 거다. 미안해요, 근데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화 못 내겠어요. 유후.


결국 다른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고무줄을 묶고 팔을 몇 번 때리더니 한 방에 빡! 링거 바늘을 넣어주셨다. 내일 수술을 위해 제일 두꺼운 바늘을 꽂아 아플 만도 했지만 이런 고통쯤이야. 배에 칼빵 잔뜩 있고 요관 끊어진 콩팥 병신에겐 아무것도 아니라네. 하하하


남편이 퇴근 후 찾아왔고 조잘조잘 오래간만에 웃으며 얘기를 나눴다. 수술 다 끝나면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돌체 라테 사다 달라고. 이제 이 하얀 영양제 수액과 식염수, 포도당 수액 대신 커피랑 초콜릿이랑 먹고 싶다고. 벌써 7일째 금식이니 누가 약 먹느라 물 마시는 것만 봐도 부러울 지경이었다. 나를 빈궁마마라 놀리던 아주머님도 수술 후 무통 주사 부작용으로 구토 증상을 보이시는데 죄송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날 놀리더니만. 흥!


남편이 돌아간 후, 여전히 수신증 증상으로 오른쪽 허리 뒤가 아프고 열이 나며 자궁 수술의 후유증으로 복근에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병원 복도를 계속 걷고 또 걸었다. 내일 수술 전에 좀 더 컨디션이 좋아야 하니까, 다리 근육이 너무 빠져버리면 나중엔 더 힘이 들 테니까. 돌돌돌 돌, 시끄러운 링거 거치대를 끌고 긴 복도를 왔다 갔다 했다. 사실 다른 할 일도 없었다. 하다못해 와이파이도 안 잡히고 병실마다 TV도 없는 곳에서 우아하게 책을 읽을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냥 걷고 싶었다.


내일 나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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