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개학이 결정되니, '이제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제대로 교육을 받겠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매일 아침, 일어나기 싫어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등학시킬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기도 한다. 지금에야 침대에서 뒹굴고 있으면, 보다 못해 아이를 번쩍 들어 EBS 강의가 나오는 TV 앞에라도 데려다 놓으면 되지만 말이다. 역시 학부모는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인 건가.
자식이 무엇을 하면, 특히나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한다면 걱정부터 앞서니, 부모님도 나를 키우며 어지간히 이런저런 걱정을 했겠다 싶다. (몇 달 전 할머님의 장례를 치르며, 십수 년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손주가 신통치 않아 걱정이다라고 하셨단다. 도대체 조부모님과 부모는 나를 어떻게 보고 계셨던 걸까...)
지금의 나야, 내 아이가 학교를 제시간에, 지각하지 않고 갈 것인가 걱정하는 수준이지만, 한 학년 올라갈 때마다 잡생각들도 더 많아지겠지. 온갖 고민을 하게 될 나 혹은 배우자의 모습, 특히나 생각대로 따라오지 않을 아이들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니, 이전 세대 아빠들의 자녀에 대한 무심함 또는 쿨함은 그 험한 꼴을 안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눈 뜨기 전 출근을 하고, 잠들 즈음에나 퇴근하는 그 피곤한 일상은 차치하고 말이다.)
'나도 살아야지'하는 마음으로, 하루 몇 시간은 아이들에게 TV를 허락하고, 나는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TV를 보거나, 아님 차 한잔 마시며 멍 때리기를 한다. 그래서 오늘 책장 파먹기로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합시다]를 손에 쥐게 되었다. 논지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이야기하다 보면 현재를 더 충실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 날을 하루 지난 시점에, 그리고 어버이 날을 이틀 남겨둔 시점에 적정한 주제일 수도 있고, 오히려 오버하는 주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삶의 끝을 이야기하는 건 아직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것도 사실이라, 몇 페이지 읽다 그만둘까 싶다가, 또 몇 페이지를 더 읽다가... 그렇게 책을 보고 있는 실정이다.
죽음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거나, 살아있음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식사'라는 행위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작자의 주장은,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작자가 이 경험을 '강의'했을 때 보인 청중의 시큰둥한 반응 이야기가 눈길을 더 끌었다. 그는 호주의 원주민 대상으로 본 강의를 진행했는데, 그들이 강의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건, 그들에게는 '죽음'이나 '저녁 식사'라는 개념이 와 닿지 않기 때문이었단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단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동일한 현상을 다른 단어와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 눈길이 갔던 이유는, 그 책의 주제와 전혀 상관없지만, '등교', '공부', '숙제' 등에 대해 아이들도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그 단어들이 주는 압박감은 부모만이 이해한다는 점에서다. 부모는 걱정하고, 안달하고, 아이들이 제대로 하도록 몰아붙이겠지만, 아이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어른과 꼬꼬마 아이들의 세계는 다르니까, 소통의 통로를 찾기까지는 부모만 발을 동동구를 것이다.
그렇다고, '학교는 빠지지 않고 가야 하는 것', '숙제는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을 아이가 체득해 간다면, 그게 결국 '세상의 모든 싫어도 해야 하는 그 수만 가지 일들에 길들여지기'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착잡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남이 아닌 부모가 그 길을 안내하고, 부모가 곁에서 응원할테니 힘들어하지 말라 하는 게 맞겠지. 그렇게 또 우리는, 부모라는 자격을 갖게 됨으로써, '싫어도 해야 하는' 또 다른 일을 수행하게 된다. 바로 "세상에는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 말이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단순한 '부양'의 부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낀다. 부모가 된다는 건, 꼼짝없이 밥벌이에 붙들린다는 것 이상의 일이고, 나쁘게 말해 나의 정신까지도 소모시키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보고서와 씨름할 때 보다, 육아휴직을 한 지금에 흰머리가 더 나고 있으니, 어지간히 아이들에게 전력을 다하고 있거나 이제껏 어지간히 놀면서 회사를 다녔나 보다.
어버이 날이 된들 특별히 더 잘 챙겨드리거나, 좀 더 상냥하게 말씀드릴 위인은 못되지만 (그리고 죽음과 삶이라는 주제는 입밖에도 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의 부모님에게 좀 더 '동료의식'을 가지고 이해하며 대하지 않을까 싶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