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015년 대만과 홍콩
대만에서 만난 20대 중반 남자아이들과 홍콩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유럽인 남자 사이에는, 그냥 개인적 성향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외부인인 나의 눈에는 환경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대만 청년들의 세계 인식은 좀 더 한국 사람들과 비슷했다. 중국 정부에게 모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계속해서 지키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녹록치 않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틈틈이 해외취업의 기회를 노린다. 대만인이라는 정신적 공동체의 정체성은 지키고 싶어하지만 경제활동의 면에 있어서는 기회가 된다면 다른 사회에 편입되고 싶어한다.
시티 투어를 시켜준 호스텔 직원 짐은 유학 경험이 없음에도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했다. 2014년 3월에 있었던 국회 필러버스터에 자기 친구들도 참여해서 자기도 음식을 갖다주러 갔었다고도 했다. 곧 중국으로 가서 일자리를 알아볼 것이라던 짐의 친구 중 한 명은 대만인의 경쟁력은 값싼 임금을 받고 오랜 시간 노동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매우 익숙한(!) 자조적 농담을 던졌다. 대만은 이미 한국과도 임금 격차가 많이 벌어졌다. 대만 물가(타이페이 기준)가 한국(서울 기준)보다 훨씬 싸기도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노동력이 굉장히 값싼 편이다. 내가 벌고 있는 월급은 서울에서의 생활 물가를 고려했을 때 결코 높은 편이 아니지만, 짐과 친구들은 내 봉급의 대략적인 액수만을 듣고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대만의 20대 대졸 청년들의 임금이 얼마나 낮은지 조금 실감이 됐다.
그러나 우리는 급변하는 ‘글로벌 사회’에 대한 두려움, 한 편으로는 엄청난 기회가 열릴 것 같지만 한 편으로는 어디에도 ‘자연스럽’고 ‘쉽게’ 정착할 수 있는 – 직업을 가지고, 연금이나 의료보험 등의 사회 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고, 원한다면 가족을 꾸릴 수 있는 – 기회는 우리에게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 서로의 처지에 동의했다. 친중 성격의 여당과 반중 성격의 야당의 대립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적 해프닝이 벌어지는 동아시아 국가의 젊은이들은 한국의 새누리당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선거철에 여론의 눈속임을 위해 당 이름을 바꾸는 것까지 비슷했으니, 어떤 맥락인지 이해하기 아주 쉬웠겠지.
29살의 마샬은 아주 달랐다.(지금은 30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이 번 돈으로 벌써 파리에 집을 마련했고 프랑스 사회 보장 제도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백인 남자다. 그는 세계 경제가 더 이상 벨에포크 시대는 아닌 장기적, 만성적 불황의 측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그건 불가항력적인 흐름이며 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불평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 개인들이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있으며 그것에 대해 자기들이 좋은 운을 타고 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박근혜 정부의 이야기에 대해서도(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는 것에 대해서 아예 판타지 소설 속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는 듯 했다) 한국에서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이고 전남편, 전남친 아니면 현재의 남편이나 애인들에게 살해 당한 여자들의 뉴스가 등장한다는 이야기에도 ‘믿을 수 없다’며 웃었다.
자신이 속한 국가와 인종에 따라 이렇게까지 기본적 세계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어딘가 우습기까지 하다. 결국 약소국의 마이너리티 인종들에게는 더 큰 세계로의 통합은 기회가 아니라 더 큰 위기일 수도 있는 것이고, 국가가 아닌 다른 어떤 기제로 치환해도 이 점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결국 직접 그 환경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남의 설명을 들어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근본적인 갈등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차별과 계급의 골이 더욱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의 간극을 인정해야 한다. 그 간극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최소한 그 사이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다. 갈등을 인정하지 않고 없앨 수 없는 간극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우리의 세계는 더 깊은 미궁으로만 빠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