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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May 23. 2021

좋은 말로 할 때

나는 전혀 나이보다 조숙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단순한 퍼피러브였지만, 어쨌든 처음 남자친구를 사귄건 중학생 때였다. 그 사실을 말하자 당시의 친한 친구는 엄청나게 놀라며 이렇게 말했었다. "난 네가 남자 혐오자라고 생각했어!"


나는 남성 혐오자일까? 저런 평가를 최초로 받았던 나의 10대 시절부터 하나씩 되짚어 보자. 일단 나는 이성애자 여자고 실제로 남자와 연애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교류를 하는 남자들을 제외한 불특정 남성 집단에는 항상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2차 성징을 겪기도 전부터 1년에 한번 정도씩 나와 내 동성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공 장소에서 성희롱을 당했고 그 희롱 가해자들 중에는 당연하게도 학교 선생님들과 같은 반 남자애들도 섞여 있었다. 굉장히 자연스럽게 '남자들은 이상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환경이었다. 이것이 남성 혐오인 것일까? 어떤 불쾌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그 남자 개인의 문제지 남자 집단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10대였던 나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을까?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대자보 문화가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학내 문화였었다. 대자보는 학내 소수 집단의 목소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방식 중 하나였고 그런 대자보를 훼손하거나 마음대로 뜯어버리는 일은 신성모독처럼 여겨졌는데, 학교 내에서 가장 빈번하게 붙는 대자보는 여성 총학생회에서 붙인 현상 비판과과 학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내용들이었고 대자보가 붙으면 학교 내에서는 항상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는데 가장 뜨거운 논쟁은 '된장녀'에 대한 것이었다. 내 주변에는 나를 포함해 아무도 아빠가 준 용돈이나 남친이 사준 밥과 가방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여자애가 없었다. 모두들 그런 가상의 여자애들을 된장녀라고 함께 비난했고 가끔 비싼 밥을 사먹는 자신의 행동을 '된장질'이라고 부르며 이런 사소한 일탈을 제외하면 자신은 원래 검소하고 개념있는 여자로서 남성들에게 인정받을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애들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지 10년 정도 돼가는 지금도 나는 인터넷에서 정의한 그 된장녀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잔인한 현실을 마주했다. 여성 집단은 정말 아무런 실질적 이유 없이 비난 받고 비하 당한다. 그리고 이런 근거없는 성차별이 여성혐오mysogyny라는 이름을 부여받기까지도 몇년이나 더 걸렸다.


된장녀 논란으로부터 몇년 뒤 페이스북에서 남자 후배가 '여성 우대 정책들'(이라고 적으면서도 이런 것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지능이 믿기지가 않는다) 중 여성 전용 주차장을 예로 들며 남자에 대한 역차별이다, 여자가 주차를 못한다고 가정하고 이렇게 공간을 할당해 주는 것은 여자들한테도 모욕 아니냐, 라고 짐짓 논리적인 척 긴 글을 썼길래 아주 다정한 어조로 댓글을 달아준 적이 있었다. "ㅇㅇ야, 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여성 전용 주차장은 CCTV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어둡고 폐쇄적인 지하주차장에서 여성 살해와 강간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도입된 제도란다. 구글에 기사를 검색 해 보렴." 후배는 아주 발랄하게 댓글을 달았다. "아 그렇군요 누나! 몰랐네요. 그치만 주차장을 제외한 다른 여성우대 정책들에는 여전히 해당 되는 얘긴거 같아요."


사실 적시를 위한 검색 한 번 안 해보고도 자신감이 넘치네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들은 여성혐오란 비난을 받으면 '저 여자 좋아해요'라고 정색하던데 그런 궤변도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나도 남자들을 사귀니까 그냥 남성 옹호자 아닌가? 이렇게나 남자를 좋아하니까 남성연대 회원 가입도 가능할 것 같은데 제가 남혐이라니요?




요즘 인터넷에서 핫한 동영상 클립 중 The Linda Lindas라는 10대 소녀 펑크 밴드가 자작곡 <Racist, sexist boy>이란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있다. 아빠가 중국인 여자애랑 놀지 말랬다고 했다며 자신에게 와서 이야기 한 백인 남자애에 대한 노래다. 비합리적이고 이상한 주변 사람에 대해 펑크 사운드로 표현하는 소녀들을 보며 <린다 린다>라는 펑크록을 들으며 보낸 나의 10대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댓글들 - "그 남자애도 어린애일 뿐인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상처를 주면 안되지" -을 보며 나와 그 여자애들이 지금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남성 혐오자 소리를 들었던 날로부터 20년 정도가 지났지만 아직 세상은 그 때 그대로란 것을.

https://youtu.be/J5AhU5Q7vH0


좋은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남성들도 이해할 수 있는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어떻게 이야기 하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까? 이제 이런 생각들은 떠올리는 것조차 귀찮다. 시간낭비도 이런 시간낭비가 없다. 이젠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어떤 대외적 언행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싫다. 나는 페미니즘 왕국에서 파견된 대외 사절단이 아니다. 30년이 넘게 좋은 말로 예의바르게 사람들과 대화하려고 애를 써 보았으면 이게 전혀 먹히지도 않고 그런다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라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 혹시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 말해지는 방식이 폭력적이고 극단적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 거리는가? 이런 왜곡된 젠더 사상을 가진 한국 여자를 훈계하고 싶어서 댓글창을 클릭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냥 페미니즘이 싫은 성차별주의자다.


지금 지구상에서 페미니스트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반인륜적 범죄를 찾아보자. 피켓 시위? 상의탈의 시위? 비출산? 도서관에서 넌 성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라고 노래 부르기? 설마 특정 손가락 모양으로 남성들에게 모욕감을 줬다고 대답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럼 이런 행위들이 너무 잔인해서 무고한 남자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가? 어떤 여자가 '나는 출산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말하면 그 이야기를 들은 남자들은 갑자기 그 여자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발로 걷어찬 것처럼 분노하고 고통 받으며 슬퍼한다. 자기 생각을 말 한마디로만 표현해도 남자를 비참의 구렁텅이에 빠트릴 수 있는데 굳이 실제 폭력으로 남성에게 위해를 가할 필요가 있나?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친딸, 수양딸, 제자, 연습생, 뭐 암튼 가지각색의 여자들을 강간하는 남성 집단도 마땅히 사랑받고 존중 받는데 딱히 뚜렷한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는 페미니스트들이 존중받지 못할 논리적 이유는 없다.

무시무시한 반인륜적 폭력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서양의 페미니스트들


그러니까 페미니즘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너 페미해?"같은 별 웃기지도 않은 말로 여성들을 '사상검증'하려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사회에 살아 숨쉬는 이유는, 페미니스트들의 전략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양성평등을 받아들일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양성평등은 남녀가 각자의 본분을 다 하는 세상이다. 그 본분이란 남자는 힘 센 가장이 되어 많은 돈을 벌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믿고 따르고 의지하며 그 댓가로 남자의 보호를 받는 세상이다.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하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폭력이고 무슨 공리주의나 관료주의 같은 '사상의 일종'일 뿐이지 추구돼야 할 가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논리적이고 좋은 말로 하는 이야기도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그런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설득하나?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이해하고 주장하던 갈릴레이도 종교 재판소까지 끌려가서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복창하라고 강요 받았었다.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도 그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대체 내가 무슨 재주로 성차별주의자들이 개심하도록 좋은 말로 설득하냔 말이다.




다시 처음에 가졌던 의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남성 혐오자일까? 페미니즘에 동조하도록 좋은 말로 남성 집단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남혐인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에 굴종할 마음이 없이 나 좋은대로 사는 페미니스트기 때문에 남혐일까?


이젠 페미니즘이든 남혐이든, 내가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그닥 상관도 없다. 맘대로 해라. 내가 왜 모종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언행을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굳이 나서서 타인을 설득하고 바꿔 나가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그게 왜 내 책임인데. 성차별주의자들은 나의 존재를 날마다 모독하는데 굳이 내가 예의 바르고 예쁜 말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당신은 성차별주의자다. 당신은 내가 좋은 말로 할 때 듣지 않았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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