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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앤디 Jan 25. 2021

96 집콕은 몇 시간이나 가능할까.






96


지난주였나.

집에 머무른 시간 96시간


영하 16도의 강추위 속

어느 날의 이야기






가끔 궁금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몇 시간을 지낼 수 있을까. 이삼일은 충분한 것 같은데 그 이상은 몇 시간이나 가능할까.


영하 16도의 강추위가 왔던 어느 날의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나갔다 온 것은 아이들과의 산책이었다. 가을씨와 겨울씨는 내 방으로 와 무지개 주스를 만들어야 한다며 애절한 눈빛을 보낸다. 재료를 사러 지금 나가고 싶단다. 미스터리 식당에 나온 그 무지개 주스. 다른 일을 하느라 보지 못했다.


엄마 그거 색깔은 무지개색이고

씨유에서 파는 신호등 사탕보다는 작고 곰돌이 젤리보다는 조금 커.


어떤 건지 잘 모르겠는데,

가게에 가보자. 너희들이 찾아봐.



집 앞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다. 구석구석 찾고 찾고... 또 찾아도 없다며 울상을 짓는다. 결국 동산에 있는 마트에 가 보기로 했다. 1시에 시작하기로 한 일이 있지만 아직 시간이 있다.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던 포근한 날이었다. 마트를 향해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틀 정도 눈이 많이 왔었고 눈 놀이하러 나갔었는데 아직 반의반도 녹지 않았다. 눈이 쌓인 곳으로만 발을 쿵쿵 굴리기도 하고 눈을 뭉쳐 던지기도 했다. 약간 녹아서 그런지 눈 밟는 소리는 뽀드득이 아니라 바스락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느긋하게 걸어 마트에 도착했다. 원하는 사탕을 찾아 몇 바퀴를 돌았다. 없었다. 울상이다. 대신 원하는 젤리를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가지지 못한 것은 신기하게도 금세 잊어버렸다. 꿩 대신 알로 고른 젤리가 마음에 드나 보다.


내려오는 길 역시 신이 난다. 장보기 포함 왕복 30분이면 충분히 끝날 일인데 구석구석 눈 쌓인 길에서 놀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신나게 콧바람을 쐬며 다녀왔다. 이런 외출을 좋아한다. 아주 가성비 최고다.



돌아오는 길에 다짐했다.

매일 산책을 하리라. 산책하는 일상, 이 좋은 걸 언제부터, 그리고 왜 잊고 있었지? 점심시간에 다 같이 나가자. 그때가 그나마 햇살이 따뜻하니까. 


몰랐다. 그날이 마지막 외출이 될 줄이야.


다음날, 다 같이 산책 가자고 했더니 

남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나가고 싶어?

진짜?

춥대,

진짜 춥대

영하 16도야, 괜찮겠어?


그래? 그렇게 추워?

나 혼자 갔다 온다?!


진짜 추워.

영하 16도라니까.

집에 있어도 춥다면서?!


......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데 몸이 좋지 않은 건지 이번 겨울은 유독 심하다. 아, 생각났다. 산책을 잊게 한 범인은 '영하 16'도 였다.


그래, 나가지 말고 환기나 자주 하자. 두 시간에 한 번씩은 창문을 활짝 열어 공기를 바꿔주는데 밖에 나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더 자주 문을 열었다. 조끼를 하나 더 입고.


어,,, 진~짜 춥다;;;;;;


내 입에서 춥다는 소리가 먼저 나온다. 환기하는 동안 외투를 하나 더 겹쳐 입는다. 못 참겠다. 이불 속으로 쏘옥 들어간다. 가을씨와 겨울씨도 뒤질세라 쪼르르 달려와 이불 속으로 훅 들어온다. 집안 곳곳에 아지트를 만들었고, 안방 한구석에는 원터치 텐트를 쳐 놓았다. 따뜻하고 아늑하다.


집이 최고다 그치?


응 엄마, 북극에 온 것 같아.

군고구마 먹고 싶다. 고구마 구워줘요.

김치랑 먹으면 좋지만, 겨울이는 김치 안먹으니까... 귤이랑 먹어도 짝꿍인 거 알지?



아무것도 안 해도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라지만 그래도 96시간은 꽤 긴 것 같다. 약간 좀이 쑤실 만큼.


긴 시간 동안 집에만 머무를 수 있는 이유는 겨울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두 번, 집 앞으로 간식과 식재료를 넣어주는 로켓배송이 있기 때문이고 가끔 친정엄마가 보내주시는 채소와 귤, 시엄마가 보내주신 냉동 재첩국이 든든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싸고. 기본적인 것 외에 자기계발이나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있기 때문이고 갑갑할 때 환기를 할 수 있는 큰 창이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안 열어서 한동안 서운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만큼 책을 빌려다 볼 수 있고 넷플릭스와 TV에서 재미있는 만화를 골라보며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가지지 못한 무지개 사탕을 잊어버렸고 그 대신 자신들이 고른 젤리에 만족한다. 나가지 않아도 북극의 텐트 안에서 이불을 쓰고 군고구마와 귤을 까먹는 재미를 안다. 가끔 불만투성이가 되는 나에게 일상의 감사와 행복을 찾으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보여준다. 가끔 누가 엄마이고 선생인지 모르겠다.




+

아,

다시 플래너를 보고 다시 헤아려보니, 96시간이 아니다

120시간이네. 딱 5일 동안 안 나갔구나...


오늘은 집 앞 빵집에라도 다녀와야겠다. 말차 스콘 두 개와 올리브 치아바타와 아이들이 먹고 싶다던 소세지빵을 사 와야겠다. 텐트 속에서 간식으로 먹으면 꿀맛이겠네.




@글쓰는별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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