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은 없다
그 위험한 눈길을 뚫고 손수레를 끌고 연탄재를 수거하러 오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 같았다. 쌓이는 연탄재만큼의 우울과 근심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나 그날 아침도 쓰레기통은 말끔히 비어 있었다.
올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나 행복하기도 했다. 올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 p.27 , 수많은 믿음의 교감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에서 만난 문장이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님의 10주기를 맞이하여 펴낸 책이다. 산문 660편 중에 베스트 35편을 선정했는데 작품을 선정하는 데에만 몇 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가장 글맛 나는 대표작으로 골랐다더니 과연 그런 것 같다.
지난 시간의 경험이 생각나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그중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수많은 믿음에 대한 교감>이라는 꼭지이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잡담을 하는데 맨 사기, 봉변당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장면이 묘사된다. 신나게 악담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팔십 노모는 '이 나이까지 그런 사람들을 못 겪어 보았으니 복도 많다,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뒤 이어 복좋은 노인이 아님에도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가 젊은이들보다 훨씬 곱고 깨끗하고 행복해 보여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10대에서 20대, 달리 생각해 볼 이유도 없이 그저 사람이니까 사람에게 친절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힘든 상황을 외면하기 어려워 먼저 말을 걸고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좋을 때는 좋았고 아닐 때는 처참했다. 그런 마음을 잘도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상대의 포장된 이기심과 나의 미련함에 몸서리쳤다.
믿었다가 속고, 마음을 주었다가 호되게 당하는 일을 반복하며 다시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멈추어 서서 오지랖도 적당히 좀 하자고, 내 코가 석자라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불쾌했던 기억은 불쑥 찾아와 나를 괴롭히곤 한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이십 대의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한 어떤 날의 모임에서 우리는 ‘누가누가 더 불행한가’를 겨루듯 배신당한 이야기, 소외 받은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었다. 안주삼아 시시덕거리며 서로의 편을 들어주고 나쁜 놈들이라며 함께 욕을 해 주었다.
'넌 그랬구나, 나는 더 심했어.' 하며 경쟁하듯이 서로에게 털어놓는다. 처음에는 시원하고 통쾌했지만 나중에는 어딘지 모르게 시시해졌고 힘이 빠졌다. 어여쁘고 좋았던 날 우리는 왜 그렇게 아픈 경험을 털어놓았던 걸까.
아마 말이라도 하고 나면 시원 해질지 몰라서, 미련했던 순간을 내 편에게 토해내고 위로받고 싶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툭툭 털고 내일 다시 정글에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어쩌면 그 순간의 미련함을 곱씹으며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언제부터 인가 더 이상 지난 일에 필요 이상의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졌다. 작가가 쓴 것처럼 '지난겨울 정말 춥고 우울하고 힘들었지만' 가끔 따스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나를 지키기 위해 꺼내 입은 강철 방어막을 잠시 내려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무수히 많은 믿음과 질서에 대해 생각해본다.
새 학년, 새 학기가 되어 아이들을 유치원으로 학교로 보내는 일만 해도 그렇다. 때가 되면 손을 흔들며 눈 앞에서 사라지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인사를 나누었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가끔은 아이들 손을 잡고 콜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달릴 때에도 안전하게 달려가 목적지에 어김없이 내려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 그곳에서도 나는 모르지만 내 이름을 아는 친절한 안내자들이 오라는 대로, 가라는 대로 순순히 향할 수 있는 것 또한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다. 좋은 재료를 넣었다는 김밥과 빵을 사 먹고, 관리와 경비, 청소의 질을 높일테니 관리비를 얼마 올린다는 통보를 받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꽃이 피는 이 봄을 반겨 맞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스크를 쓰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봄은 또 오고야 만다는 순리, 자연은 늘 그러하리라는 기다림과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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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꼭지 <글을 쓰는 중년 여성의 허기증>에 대해서는 할 말은 많으나 표현이 잘 되지 않는다. 애써 글을 쓰는 이유도 그 허기증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때로는 가족 몰래 글을 쓰고 때로는 남편의 코골이를 들으며 이불을 쓴 채 엎드려 글을 썼다던 작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생각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가감 없이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글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 아니, 그 관심이 되려 부담스러우려나. 아무튼 일상과 사람을 더 깊이 관찰하고 나만의 언어를 벼리고 글로 토해내고 싶다. 이 봄과 함께 더 열심히, 더 많이 쓰는 날을 만들겠다고 다짐해본다.
@글쓰는 별사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