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아이가 답한다
이른 아침. 잠이 덜깬 다섯살 겨울씨가 내 방문 앞에 섰다. 꿈뻑꿈뻑 눈을 비비며 묻는다.
"엄마! 태풍 왔어?"
"아니. 아직 안왔어."
#오늘의하늘 #하늘스타그램 #태풍전야
"아직이야? 왜? 할머니네 집은 어제 왔다며. 우리집은 언제 오는거야?"
"글쎄, 엄마도 잘 모르겠는데, 언제올까?"
"(하늘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엄마! 그런데 있잖아 태풍은 ...... 원래 파란하늘도 있는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 그래? ...... 원래 그런거야?"
"어! 그건 원래 그런거야!
엄마 하늘에 ... 있잖아 ......
물개가 악수하자고 하면 태풍이 오는거야 엄마. 원래 그런건데 엄마는 몰랐지?!"
"......
어... 몰랐어. 진짜 몰랐어."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니 아이말대로 하늘 속에 물개가 친구에게 악수하자고 하는 것 같다. 요즘 둘째 아이와의 대화는 일상의 비타민처럼 톡 쏘는 달콤쌉싸름한 맛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를 콕 찝어서 말하기에 즐겁고 재미있다. 물론 되지 않는 논리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 때도 여러번 있지만 때로는 핵심이 있는 말을 툭툭 전져 가슴이 뜨끔하기도 하다.
요즘 아이가 자주 쓰는 말은 이것이다.
"그건 원래 그런거야!"
사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대답을 했었다. 다섯 시에 문을 닫는 키즈룸에서 더더더 놀고 싶다고 외칠 때에는 "규칙은 규칙이야, 원래 이 곳은 다섯 시가 되면 다 나가야 돼." 플라스틱 치발기 공 속에 고정되어 있는 작은 구슬 공을 꺼내달라고 떼를 썼을 때에도. "이건 원래 이렇게 만들어져서 꺼낼 수 없어. 원래 그런거니까 이해해. 엄마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지만 힘겨운 일상이 이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전재산을 다 털어 분양받은 새 집, 그 곳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들. 입주민들과 힘을 모아 저항하고 개선을 요구하고 갑질의 횡포를 알리며 애를 썼지만 범법은 아니라는 말과 뉴스를 접한 가까운 이들의 조롱에 반복적으로 무너졌다. 돌아오는 것은 수치심과 초라함, 그리고 무력함 뿐이었다.
왜 사는 걸까?
내가 사는 세상은 대체 뭘까?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마음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질문들, 그저 갑갑하기만 한 날들. 안다. 세상에는 원래 그런 일들이 많다는 것을.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들, 개인의 뜻과 힘을 모아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 정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맞서는 날들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았고 신경을 쓰면 쓸 수록 일상은 황폐해졌다. 그들의 세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힘이 없다는 것을. 그 쓰디 쓴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고 답답할 때는 이어폰을 꽂고 집 밖으로 무작정 뛰쳐나갔다. 제한시간 30분 안에 돌아와야 한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하는 만화를 틀어주고 김밥을 사 온다는 핑계로 걷고 뛰었다. 눈물이 난 것도 같다. 유튜브로 명상이나 법륜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심호흡을 한다.
어느 날도 마찬가지로 이어폰을 끼고 걷고 뛰고 숨을 쉬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명쾌한 처방에 눈이 뜨였다.
나 잘 살고 있는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왜 사는걸까, 자꾸 이유를 물으면 거짓말처럼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 있으니까 살아내는 거라는 말. 어쩌면 사는 동안 무수히 내 곁을 스쳐지나갔을 단순한 말인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은 따스한 위로로 들렸다.
힘들고 버거워도,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하루하루 잘 견디고 살아내야 한다. 크게 울고, 다시 크게 웃고 일어서야 한다. 적절한 이성과 열정으로, 또 행동으로 나에게 주어진 '원래 그런 오늘'을 덤덤하게 살아내본다. 곁에서 지켜보는 네 개의 맑은 눈, 바로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