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녀석을 만난 날로부터, 진작 일기를 쓰려고 했지만 글쎄... 복잡한 머릿속이 생각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이랬다. 녀석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특제 레시피로 만든 요리를 먹고 난 후, 그때와는 달리 아쉽지 않은 이별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이 터올 무렵 급작스레 눈이 떠졌고, 창가로 비쳐 드는 푸르스름한 달빛의 기운에 침상을 털고 일어났다. 그 길로 집을 나섰다. 나가기 전, 현관 앞 거울 속에 블랙은 간데없이 푸르른 음영에 물든 리틀만이 보였다.
엔진 소리에 녀석은 잠에서 깼을 수도 있다.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지금의 헤어짐은 영원한 이별이 아닐 것임을 알고 있다.
You the only man that’s ever touch me.
You’re the only one.
I haven’t really touched anyone since.
간밤의 고백으로 녀석은 조금 혼란스러워진 듯했다. 하긴,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으리라. 그 옛날 해변에서 나누었던 첫 키스, 같은 것쯤은. 그러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지 않은가. 각자의 색으로 살던 우리가 잠깐 섞여 푸른빛을 띠게 되는 일처럼 말이다. 이후, 오랜 세월을 견디며 목구멍 가득 차올라버린 말을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녀석에게 털어놓아야 했다.
리틀에서 샤이론으로, 다시 블랙으로 살며 나는 단 한 번도 내면의 소리에 솔직하게 응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녀석을 보자마자, 결의는 무장해제되었다. 엄마에게조차 내뱉기 두려웠던 말들을... 어쩌자고 녀석에게 쏟아버린 것일까.
잠들기전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케빈,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글쎄... 적어도, 내겐 딸이 그 이유가 되는 거 같아. 너는 어때?”
“아직도 멍청한 아이지. 서른이 넘었는데 이런 질문이나 던지고 있으니 말이야.”
채 대답이 끝나기 전에,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어버린 녀석의 이마 위로 달빛이 고고히 내려앉았다. 문득 녀석의 방에 시선이 갔다. 뒤집어진 파자마, 뚜껑이 닫히지 않는 셰이빙 크림, 먹다 남은 프링글스 조각. 어쩌면, 그도 나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녀석이 근무하는 식당 앞에서 옷매무세를 가다듬으며 할 말을 고르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안녕, 잘살고 있었니?
그리웠어,
그 한 마디면 됐을 것을...
나는 아직도 어떤 시절을 제대로 건너뛰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근사하게 보이려 애를 써봤자, 녀석은 어둠(black) 너머의 다른 것을 꿰뚫어 보았고, 나는 짧지 않은 생에서 녀석에게 자꾸 무언가를 들키길 반복했다. 그러니 그 억울함에 대해 언젠가 녀석과 함께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눠 봐도 좋지 않을까.
녀석의 집을 빠져나올 때, 이미 나는 어딘가로 가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색채가 빠진 거리, 차라리 푸르름에 가까운 텅 빈 도로를 지나 해변을 향해 차를 몰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묻고 앉아 여명이 밝아오는 수평선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울어가는 달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