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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truly found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by Ander숙

올 겨울은 바지 3벌로 잘 보냈다.

지난 11월쯤, 뜨끈한 기모가 들어간 편안한 츄리닝 바지를 샀다.

3장에 단돈 39,900원. 검정, 빨강, 베이지로 구성된 세트 상품이었다.

디자인은 딱 가격만큼이었지만, 품질은 가격보다 훨씬 뛰어났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겨울에 이만한 바지가 또 있을까.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엄마에게도 사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시절에는 스키니진과 하의실종 패션이 유행이었다.

키가 작은 나는 스키니진보다는 짧디 짧은 반바지를 선호했다.

한 뼘 정도밖에 안 되는 트렁크 팬티보다 못한 그런 바지를 한 겨울에도 입고 다닌 스무 살을 떠올리면 아련하다기보다는 아찔하다.

엉덩이 가리개 수준의 바지가 그렇게도 멋져 보였고, 들어간 옷감의 양과 비례하지 않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했다.

현대판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달까?

내 딸들이 나중에 그런 바지를 입고 다니면 어디서 천이라도 구해와 기워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실용성이나 편안함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유행만을 따랐던 20대였다.

다른 대학생들처럼 굽이 10센티가 넘는 가보시 구두를 신고, 스키니진을 입고, 그라데이션으로 립 메이크업을 하고 물결펌을 한 나의 20대, 누군가의 20대.

유행은 돌도 돈다지만 그때의 유행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싶다.

하지만 다시 유행이 된다 하여도 상관은 없다.

이젠 난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었으니깐.


스무 살의 나는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지 몰랐다.

그래서 유행하는 옷을 입고, 유행하는 노래를 들으며 나에 대한 무지로부터 오는 불안함을 달랬다.

유럽에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도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국적을 가진 친구들과 그룹을 만들어 놀았다.

늦은 저녁까지 친구들의 플랫에서 와인을 마시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 가고, 잘 이해하지 못한 농담에도 애써 따라 웃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피로가 몰려왔다.

난 이탈리안 룸메이트와 함께 먹는 특별할 것 없는 저녁이 좋았고,

창이 큰 방에서 멀리 보이는 수도원과 그 풍경의 변화를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나에 대해 조금씩 알 게 되었다.


첫 직장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대학생 때는 대기업에 들어가 마케팅 같은 업무를 하는 멋진 직장인을 꿈꿨다.

매일같이 바쁘게 일하지만 커리어를 쌓으며 인정받고 성장해 나가는 나를 꿈꾸며 서울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행복이 아니었다.

서울 생활은 도무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고향에 내려와 부모님과 매일 부대끼며 시골의 작은 농협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삶이 온전히 내 것임을 느꼈다.


새삼 나이 드는 것이 이렇게나 좋다.

서로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단계를 거쳐 나와 함께 이것저것을 해보며 비로소 나는 예전보다 나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에게 주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애써 참아보라 하지 않는 지금의 나에게 더 고마움을 느낀다.


아직까지도 서로 모르는 게 많아 조심스러울 때도 있지만 또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 더 많이 알게 되겠지.

좋아하는 옷을 겨우내 입고, 입에 맞는 음식을 더 자주 먹는 고집스러운 늙은이가 되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누구보다 내가 나를 더 아껴줄 수 있을 것 같다.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I got this. I've truly found.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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