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무지개물고기의 사랑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없는지 민호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피곤과 술기운으로 무거워진 몸을 침대에 내동댕이친다.
흥수도 머리가 빙글 뱅글 돌고 있지만, 오는 길에 하늘에 밝은 달을 보며, 들어가서 이제껏 쌓아온 감정을 고백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민호가 저 모양이다.
“야, 민호야. 정신 차려!”
“아이, 왜? 힘들어, 잘 거야.”
“똑똑똑!”
그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노크소리가 들려 문을 살짝 열고 보니, 필화 대리다.
“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우리 술 더 마실래요?” 손에 들고 온 양주병을 좌우로 흔들며 농염한 미소를 짓는다.
“…, 민호가 벌써 골아떨어졌….”
“아, 필화 대리님, 우리 더 마셔요.” 갑자기 민호가 문 쪽으로 뛰쳐나오며 소리친다.
‘저 자식, 그래 잘 됐다. 더 마셔보자고.’
“들어와요. 대리님.”
옷을 갈아입고 잠자려다 온 건지 가슴라인이 깊게 파인 필화 대리의 잠옷 같은 옷차림이 섹시하고 편해 보인다.
“안 그래도 아쉬웠는데 때 마침 잘 오셨어요.”
흥수는 민호의 말에 또 오기가 발동한다.
‘이것 봐라.’
얼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필화 대리는 작은 잔에 양주만 가득 따른다.
“우리 진짜 진실게임해요. 말 안 하면 원샷입니다. 호호호”
“저부터 할게요. 궁금한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민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귀는 사람 있어요?”
“아뇨. 호호호.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누군데요?”
“잠깐!, 진도가 왜 이리 빨라요. 천천히 합시다. 그리고 질문과 답은 하나씩, 다음은 민호.”
“민호 너는 황 팀장님 어때?”
“뭐가?”
“황 팀장님 좋아하냐고?, 황 팀장님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아냐. 팀원이라 챙겨주시는 거지. 나도 팀장님이니까 따르는 거구. 그리고 연상이잖아.”
“연하면 괜찮다는 거냐?”
“팀장님으론 좋은데 내 스타일은 아냐. 난 필 대리님 같은 스타일이 좋던데. 하하하.”
“호호호, 내 스타일이 어떤데요?”
“잠깐, 다들 왜 이리 말들이 많아, 재미없게.”
“왜요? 재미있는데, 그럼 흥 대리님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자, 건배나 합시다!”
셋은 쭉 술잔을 들이켠다. 서로 질문해 주길 고대하며….
“필화 대리님, 오늘따라 참 예뻐 보여요. 하하”
갑자기 던진 민호의 말에 흥수는 당황하며 말을 가로챈다.
“장 대리가 취했나 보네요. 하하”
“아냐. 나, 사실은 대리님 좋아해요. 욱~ 잠깐, 화장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민호는 화장실로 달려간다.
화장실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조용하다.
“대리님, 민호가 취한 거 같으니, 오늘은 그만해야 할 거 같네요.”
“흥 대리님, 사실은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나, 대리님 좋아해도 돼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미안해요. 민호 때문에 정신이 없네요. 낼 봅시다.”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필화 대리를 문 쪽으로 안내해서 내보낸다.
필화 대리는 왠지 쫓겨난 기분이다.
만취상태인 민호가 화장실에서 나오질 않는다.
'혹시 잠든 건가?'
역시나 화장실변기에 엎어져 있다.
“야, 민호야. 정신 차려!”
“아, 죽겠다.”
침대에 끌어다 눕히자, 바로 잠들어 버린 민호를 유심히 쳐다본다.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이 아이같이 순진하게만 보인다. ‘이 녀석,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후후, 잠자긴 다 글렀군.’
흥수는 싸늘한 탁자에 남아있는 양주를 벌꺽 들이킨다.
다음날 아침, 머리가 깨질 듯 아픈 민호.
깨어보니 양주병과 잔이 그대로 놓여있는 탁자 앞 소파에 앉아 졸고 있는 흥수가 보인다.
“흥수야. 밤새 그러고 있었어? 침대에서 편하게 자지?”
“어. 일어났니? 이리 와봐.”
민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감싸며 흥수 앞의 소파에 털썩 앉는다.
“머리 아파 죽겠다. 밤새 술 마신 거야? 혼자?”
아무 말이 없다.
민호는 감싸 숙였던 머리를 들어 흥수를 쳐다본다.
잠을 안 자서 그런지 흥수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날카롭고 불안해 보인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다짜고짜 민호에게 물어댄다.
“민호야, 넌 날 어떻게 생각해?”
“뭘?”
“난 너 좋아하는데….”
“……”
아침 일찍 중국관광을 위해 호텔로비에 모였다.
다들 숙취로 초췌한 모습이다.
하지만, 언제 기회가 있겠는가? 유명한 만리장성과 자금성, 천안문광장은 봐야 한다기에 마지막 관광을 위해 이런 피곤쯤은 이겨낼 젊음이다.
팔짱을 껴고 가이드를 따라 모처럼 이곳저곳 열심히 관광 중인 황 팀장과 김 실장, 그리고 여전히 어젯밤의 뫼비우스 띠 위를 걷고 있는 세 명의 대리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만,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밤새 마신 술로 피곤한 몸만큼 마음도 무거워진 그들, 서로서로 거리를 두고 걷고 있다.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답게 만리장성은 길기도 하고 자금성은 어찌나 넓은지 피곤만 쌓일 뿐이다.
흥수는 심각해져 있는 민호의 반응에 난처하나, 속 시원하다.
‘곧 내 맘을 알아주리라.’ 피곤한 몸으로 그를 살피며 걷고 있다.
그 뒤엔 필화 대리가 생각에 잠긴 골똘한 표정을 지은 채로 혼자 걷고 있다.
흥수 대리가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장 대리는 날 좋아하는 거 같은데….' 생각할수록 몸이 피곤해서인지 머리만 아파온다.
서울에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민호는 몹시 당황스럽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간에 들은 말이라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흥수의 얼굴을 보니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가끔 너무 잘해준다 생각은 했지만, 원래 그런 성격인가 보다 하고 별생각 없이 지내왔건만, 친구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어쩔 줄 모르겠다.
옆에서 걷고 있는 흥수를 쳐다볼 수가 없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리가 안 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찌 대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렇게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힘든 관광을 마치고, 일주일간의 중국에서의 일을 뒤로하고 서울로 가는 밤 비행기에 탑승한다.
안녕~ 중국.
※ 뫼비우스 띠 : 수학의 기하학과 물리학의 역학이 관련된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도형이다.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를 쉽게 알 수 없는 왜곡된 현실의 상징으로 창작물에서 루프물이나 시간여행 등의 상징으로 많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