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무지개물고기의 사랑
[흥수의 시선]
연일 비가 쏟아지고 있다.
흥수는 우울하다.
중국 출장 후 민호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
'이런 게 아닌데….'
퇴근시간이 되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이 없어 비 오는 하늘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발걸음을 못 떼고 있는 민호를 보고 흥수가 우산을 건넨다.
흥수는 민호가 우산 없이 출근한 걸 알고 미리 여분의 우산을 준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호야, 여기 우산 받아. 급한데 이거라도 일단 써라.”
민호가 흥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왜 그래?, 뭐 묻었니?”
‘이제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불안과 설렘이 교차한다.
흥수도 민호의 눈을 쳐다본다.
슬픔이 담겨있다.
흥수가 건넨 우산을 쓰고 오랜만에 비 오는 퇴근길을 나란히 걷고 있다.
흥수는 다시 다짐한다.
‘그래, 난 널 사랑해. 주저하지 않을 테야. 난 널 믿어….’
한참 동안 빗소리만 들리더니, 드디어 민호의 나지막한 음성이 비 사이를 뚫고 뚜렷하게 들려온다.
“비도 오는데 술 한 잔 할까?” 민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흥수는 바로 답한다.
“좋아, 집 근처에 비 오는 날 가기 좋은 포장마차가 있어. 내가 살게 어서 가자.”
금세 도착한 포장마차의 투명한 비닐을 걷어 안으로 들어선다.
시끄런 빗소리가 들리는 밖과는 다르게 아늑한 포장마차 안에는 서너 석 자리에 손님이 삼삼오오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고 지나간 발라드음악이 공간을 애절함으로 채우고 있다.
연극무대라도 되는 양 주인공처럼 비어있는 중앙의 자리에 앉아 분위기 탓인지 즐겁게 이야기 나누며 술을 마신다.
포장마차는 어느새 만석이 되고 점점 취해가는 두 사람.
비 오는 무대를 마차가 손님을 안전하게 태우고 엔딩을 향해 빗속을 달리고 있다.
흥수는 기분 좋게 술 마시는 민호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준 거라 생각한다.
“민호야! 문 열어 놓을 테니, 우리 집으로 와”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흥수는 먼저 나왔다.
현관문을 열어놓고 애타게 기다리는 흥수.
그의 모든 감각이 문 쪽으로 예민하게 쏠려 있다.
‘그가 올까? 이 연극은 해피 엔딩일 거야, 제발~’
십분,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하릴없이 흘러만 간다.
밤새 기다렸지만, 민호는 오지 않았다.
아프지만 이젠 정말 끝이다.
오해를 한 것이다. 자신과 같다고, 좋아할 거라고...
연극은 끝났고 결말은 새드 엔딩이다.
[민호의 시선]
중국에서의 흥수의 말은 충격이었다.
민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흥수를 어찌 상대해야 할지 정리가 되질 않는다.
흥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니, 그는 자신에게 너무 잘해 주고, 항상 옆에 있었다. 그가 있어, 직장생활이 즐거웠던 거 같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좋아한다고?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간 으레 옆에 있어 신경 쓰지 않았고 자세히 보지도 않던 동기 흥수를 그날 이후 신경이 쓰여 유심히 보게 되면서 많이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모습에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 싶어 마음이 불편하다.
예전처럼 좋은 친구로, 아니 더 친한 친구로 자연스럽게 다시 지내면 좋겠는데….
오락가락하며 비가 온다.
장마철에다, 흥수 생각에 더 우울하다.
우산 없이 출근해서 시원스레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며 회사 출구에서 가지 못하고 있는데 흥수가 우산을 건넨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저 단순한 얼굴에 우울감이 너무 많이도 묻어 있다.
‘나를 사랑하고 있단 말인가?’
오랜만에 흥수와 퇴근길을 함께하고 있다.
민호는 예전처럼 즐겁게 술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흥수야! 비도 오는데, 술 한 잔 할까?”
“좋아, 집 근처에 비 오는 날 가기 좋은 포장마차가 있어. 내가 살게 어서 가자.”
기다렸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재촉한다.
도착한 포장마차에 들어서니 애절한 음악이 흐르지만 사람들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비어있는 가운데 쪽의 자리에 앉아 닭똥집이 맛있다며, 따뜻한 국수와 닭똥집, 소주를 주문하는 흥수.
그의 고백을 듣고 나서야, 이상했던 그의 행동하나하나가 이해됐고 마음이 아팠다.
기분 좋게 웃으며 큰소리로 주인처럼 떠드는 흥수.
취기가 조금씩 오르고 심각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마시며 떠들고 있다.
건배하며 회사의 이 얘기, 저 얘기 뒷담화를 나눈다.
그러나 이젠 예전의 느낌하고 다르다.
시간은 금세 흐르고….
흥수가 문을 열어놓을 테니 자기 집에 오란다. 그리곤 가버렸다.
‘아, 난 그냥 즐겁게 지내고 싶은데... 친구를 잃겠구나!’
민호가 포장마차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비는 그쳤는데 하늘이 빙글빙글 돈다.
“택시!”
“사당동으로 가주세요.”
과음과 답이 없는 문제들로 머리가 아프다.
민호는 택시 안에서 생각한다.
‘사랑과 우정이란 무엇인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사랑이고 남자를 좋아하면 우정인 것이다.
실은 우정과 사랑의 차이도 잘 모르겠다.
혼자라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 필요한 거고 사랑도 우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당연히 여자와 결혼해서 자식도 낳으리란 망연한 생각만 할 뿐, 여자를 만나기 위해 또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는 이 나이 되도록 섹스 한번 못 해본, 순진 덩어리….
아니, 그냥 무관심했다고 해야겠다.
이성에 대해, 사랑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던가?’
그런데, 지금 흥수로 인해 깊게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거, 이성애와 동성애, 결혼에 대해서….
일하고 즐겁게 놀기만 하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대상으로만 생각한 상대가 아닌 결혼도 하고 섹스도 하고 아기도 낳고 가정을 꾸리며 행복을 느끼며 사는 거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한다.
세상에 맞추며 바르게 자라온 민호는 이런 것은 여자와 하는 거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흥수에게 좋은 여자를 소개해 주리라 생각하며 민호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흥수와 민호는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너무 달랐다.
서로 좋아했지만, 하나는 사랑으로 하나는 우정으로.
민호는 동성 간에 사랑을 몰랐고 그렇게 순진하게만 자랐다.
학교 교과서처럼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여자여야 한다고만 뿌리 깊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랑에 대해선 경험 없고 미숙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민호는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누군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되는 눈치 없는 어린아이였다. 아직 유아적 심리를 가진 성적인 정체성을 모르는 몸만 커버린 아이어른.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영화관은 남녀가 가는 게 일반적이고, 남자끼리 가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로맨스영화를 보며 먹는 흥수가 건네는 팝콘은 달콤하기만 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민호의 행동과 가치관은 흥수에게 자기와 같다는 오해를 하게 한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오해.
그래서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공감 못하는 서로다.
흥수는 힘들지만, 오늘도 먹고살기 위해 다시 출근한다.
민호가 보인다.
그러나 이젠 민호는 흥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외면한다.
.
.
민호가 다가와 말한다.
"흥수야, 김 실장님 괜찮던데…."
"뭐? 그래서?"
"아니…, 그냥."
의미 없는 말들….
시간도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