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맥주
20대 초반에 20대 후반 혹은 30대의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맥주를 냉장고에 가득 채워두고 자기 전에 마시면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며, 왜 그게 행복의 기준이지?라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게 된 것이다. 마트를 갈 때마다 수입맥주 코너에서 한참을 기웃거리다가 계획에 없었던 맥주를 한 아름 집어오고, 그 맥주들을 냉장고에 가득 채워두고 나도 모르게 흐뭇해했던 그 어느 날. 나는 어른이 되었구나 실감을 했다.
고백한다. 사실 나는 술에 매우 약하고,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일단 맛도 없고, 취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고, 내가 흐트러지는 것도 싫었다. 아마도 조부모와 살고, 교회를 다니던 10대 때 학습된 영향이라 생각한다. 일탈을 원하고 반항을 하고 싶었던 사춘기 시절에 또래들이 밤에 공원 구석에 모여 몰래 마시던 술자리에 동행한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건네준 소주잔을 들고 한 모금 꿀꺽 마신 것이 나의 첫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술 혐오에 빠졌다. 이렇게 맛없는 걸 왜 마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칭 술 혐오자인데, 재밌는 건 집안의 어른들은 대부분 흔히 말하는 ‘주당’이다. 나의 부친은 반주를 곁들이는 건 일상이고, 부친의 형제들과 사촌들, 매제들도 모두 술을 사발로 마시는 사람들이다. 집안 모임을 할 때마다 종류별로 모두 비워내는 걸 자주 경험했다. 어쩌면 나의 술 혐오는 집안의 환경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반면에 나는 맥주 한 모금만 마셔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는데, 외할머니가 술을 한 모금도 못 드시는 걸 알게 됐다. 그제야 살짝 납득이 됐다. 나는 외탁이었구나.
다시 돌아와서 그런 내가 어쩌다 맥주에 빠지게 되었나 생각해 보았다. 술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수면장애가 심했던 시절에 동네 작은 바 bar에서 일했는데, 그때 술이 궁금해졌다. 술을 공부하면서 술의 종류가 소주와 맥주, 막걸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술에 다양한 맛과 향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됐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편적인 경험과 교육, 인식으로 인해 얼마나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나 스스로 반성을 했다. 그랬다. 술이 문제가 아니라 술을 마신 사람이 문제였다. 술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것도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 중의 하나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와인과 맥주다. (와인은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고) 맥주는 접하기 쉬웠고 일단 소주보다는 맛있었다. 지금은 입에 대지도 않는 벨기에산 호가든이 시초였고, 그다음은 레페브라운으로 넘어가면서 흑맥주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 커피를 좋아하니까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새로운 맥주를 하나씩 마셔보면서 세상에는 맛있는 맥주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조금만 마셔도 취한다는 건 여전했지만, 점점 더 나의 냉장고에도 맥주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요즘에는 무알콜 맥주에 빠져 있다. 무알콜 맥주가 술도 아니다, 그게 맥주냐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건 그들의 취향이니 존중한다. 하지만 정말 맥주를 좋아하는 어른이라면 무알콜 맥주의 매력에 금세 빠지게 될 것이다. 나의 경우는 취하는 건 싫은데 시원하고 쌉쌀한 맥주가 간절해지는 순간을 해소해 주기 때문이었다. 0.1% 미만의 맥주인 경우 마시면 몸이 살짝 뜨거워지기는 하지만, 취하지 않는다는 건 큰 장점이다. 맥주를 마셨지만 운전도 할 수 있다. 거기다 알콜 맥주를 마신 것 같은 만족감도 찾아온다. 요즘에는 브랜드 별로 무알콜 맥주를 만들고 있는데,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요새는 무알콜 맥주가 대세라는걸. 그나저나 맥주를 왜 냉장고에 쟁여놓고 매일 밤마다 마시냐고 물어보던 내가 이제는 어떻게든 마셔 보려고 맥주 맛을 스스로 찾고 있다니. 어른이 되어서 경험하게 된 재미가 더 많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냉장고 속에 있는 산미구엘 무알콜 맥주나 한 캔 마시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