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그림, 김지현 그리고 씀, 파시클 펴냄
여러분께 한 주에 한 권씩 책을 소개해드리는
아날로그 라디오 ‘리드-해’, 여섯 번째 방송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할 책은 파시클에서 펴낸
<앙산한 저 나무에도 언젠가는 잎피 피갯지> 입니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증언 및 각종 활동을 해 오셨던 故 김복동 님이
나눔의 집에서 지내시던 시절 직접 그리셨던 그림을
김지현 님이 그림과 글로 김복동 님의 이야기를 풀어냈고
파시클에서 펴내어 3년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경남 양산에서 거주하던 만 열 네 살의 소녀 김복동이
집을 떠나던 날부터 시작해서 8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고,
증언을 하고, 이후 나눔의 집에서의 소회까지
길고도 여러 감정이 오간 시간이 그림들에 담겨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매개로 김지현 님의 글과 그림들이
고인이 되신 김복동 님이 마치 우리에게 직접 들려주는 듯한
생생한 목소리로 다시 탄생하여 책에 담겨 있습니다.
회화를 전공하신 김지현 님이 직접 그리신 그림이 더해지면서
김복동 님의 서사와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데요,
저는 그림도 좋았지만 지현님의 글이 참 좋았어요.
읽으면서 글이라기보다 여러 장르의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글은 잔잔한 발라드, 어떤 글은 빠른 호흡으로 넘어가는 힙합...
그렇게 이입을 해서 그런지 저는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고
제 호흡을 가슴 속에 담아두는 시간이 필요 했어요.
파시클에서 이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출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재학 중이던 2000년 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일본군 성노예 모의 법정>이라는 연극이 만들어졌어요.
그해 봄에 이화여대에서 처음 공연이 열렸고요,
같은 해 저희 학교 가을 대동제에서 총여학생회 주최로 연극을 올리게 되었어요.
주변 분들이 추천해주셔서 저는 그 연극에서 2부의 주인공 할머니 역을 맡았는데요,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하기 전이였던 여름방학 끝자락에
출연진과 준비 인원들이 함께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함께 갔었어요.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는 종종 갔었지만
피해자 분들이 계시는 나눔의 집은 처음 갔었는데요,
특히 역사관에 들어갔을 때 굉장히 쇼킹했어요.
어두운 동굴 같은 느낌이었는데 피해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게 되니까
역사관 밖으로 나왔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어요.
할머님들을 뵈러 가야 하는데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계속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런 저를 오히려 달래 주시고 괜찮다고 다독여주셨죠.
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친가와 외가 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그때가 할머니의 품을 처음 느껴본 순간이었어요.
좀 진정이 되고 나서 할머니들 웃게 해드린다고 트로트 몇 곡을 불러 드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또 놀러 오라’고 하셨는데 다시 못 간 게 죄송해지네요.
그때 어느 할머니 손을 꼬옥, 붙잡고 마루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데
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창 넓은 모자를 쓰고 고추밭에서
혼자 일하고 계시던 할머니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책 속의 구절이 있어서 읽어드려 볼게요.
바깥이 요란한 걸 보니 오늘은 한참 덥겠어.
창 넓은 모자와 수건들을 챙겨 밭으로 나서는
형님의 양손도 투명하고
모두가 닮은 꽃에 둘러싸였다
흙을 밟으면 수줍은 소녀의 얼굴이 피어나고
움튼 밭고랑마다
햇빛을 동그랗게 안아 든 나비의 알이
이파리 까슬한 배를 꽉 붙들어
온 생을 걸고 맺혀 있다
세 번 사는 삶이 여기 또 있네, 징하게도 살아남았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은밀하고 치밀하게 모은 빛으로
날개를 펼치는 나비처럼
봄을 흔들어 깨워 곧 세상을 뒤덮을 거라며
고요 가운데
호미를 든 손들이 부지런히 땅을 북돋는다
모자의 그림자가 잘록해지고
나무의 그늘이 짙다
목에 걸친 푸른 수건을 풀고
서로의 등에 기대어
숨을 쉰다
서울 간 김에 오랜만에 인사드린다고 파시클 사무실에 들렸는데
마침 이 책이 인쇄되어 나온 날이어서
운 좋게 책이 나오자마자 선물 받았어요.
‘책 소개를 하는 큐레이터’라며 저에게 이 귀하고 값진 책을 선물해주신
그리고 이 책을 세상에 드러 낸 파시클 박혜란 대표님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책 마지막에는 김지현 님의 에필로그가 담겨 있는데요,
책에 담겨 있는 말들을 한참 마음 속으로 오물거리고 나서
제가 요즘 즐겨 듣는 자우림 김윤아와 원슈타인이 부른
<진심으로 너를 위해 부르는 노래>라는 곡을 찾아 들었어요.
‘삶이 비록 짧은 기록 이어도 / 네가 길을 찾아가길 널 사랑하길
/ 자유롭게 날아오르길 바래‘
추석 연휴도 시작되었고 10월 중순까지 대체 휴무로 인한 연휴들이 있잖아요.
이 책을 읽으신 다음에 故 김복동 님의 다큐멘터리 영화인
송원근 감독님의 <김복동>을 굿다운로드로 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오늘은 故 김복동 님의 그림을 매개로 그림과 글로 다시 태어난 한 소녀의 이야기,
<앙산한 저 나무에도 언젠가는 잎피 피갯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달이 참 동그라니 밝고 좋은 날, 행복하시기를.
* 이 글은 유튜브 <Analogue Radio>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방송 대본입니다. 본 방송은 https://youtu.be/mJrvmk6tSM0 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