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효정 씀, 포도밭출판사 펴냄
10월의 시작과 함께 하는
아날로그 라디오 ‘리드-해’, 여덟 번째 방송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할 책은 채효정 님이
세상을 그려낸 메시지 모음집인 <먼지의 말> 입니다.
이 책은 정치학자 채효정 님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텍스트들의 일부를 모아
묶어낸 에세이면서 사회평론집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분의 오랜 벗인 포도밭출판사 대표 최진규 님이 출판 제안을 하면서
온라인에 게재 되어 있던 글들이 책이라는 형태로 재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두 분을 좋아하는지라 출간되기 전에 소식을 먼저 알 수 있었는데요,
일단 표지를 보면, 새하얀 바탕에 본문의 일부 텍스트들이 배경으로 깔려 있고
가운데에 ‘(먼지의 말) 채효정 (없지 않은 존재들의 목소리)’라고 제목과 필자가
배경 텍스트 정도의 크기로 작게 담겨져 있습니다.
표지에 깔려 있는 텍스트는 마치 돌에 새겨 넣은 것처럼
먼지의 느낌을 살려 색깔 없이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요,
최진규 대표님께 여쭤보니 이런 인쇄 방식을 ‘형압’이라고 한다고 해요.
동판으로 모양을 떠서 꾹 눌러 튀어나오게 하거나 움푹 들어가게 하는 것인데,
포도밭출판사에서 이전에 펴냈던 제주 제2공항 투쟁 에세이인 <광장이 되는 시간>은
표지가 이번과 반대로 깔린 텍스트가 튀어나와 있는 형태였기에 흥미로웠어요.
이 책에서는 여러분이 뉴스에서 한 번쯤은 들었을만한 사람들부터
조금 낯설 수도, 하지만 결국은
다른 듯 하지만 비슷한 원인과 맥락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는 뜨겁게 분노하는
채효정 님의 감정과 숨결들이 담겨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번에 읽으면서 굉장히 소름 돋았던 부분이 있었는데요,
아마 뉴스나 SNS로 소식 접하신 분들이 많이들 계실 텐데요,
지난주에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는 외벽 청소 중 보조 구명 밧줄 없이 작업하다가
작업용 밧줄이 마모되어 20대 청년 노동자가 추락사했으며,
40대의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는 실적 압박과 미흡한 안전대책 속에서
좁고 낡은 베란다에 있는 세탁기를 수리하다가 감전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책의 148과 9쪽에는 2019년에 외벽 청소를 하다가 추락사한 노동자가,
150쪽에는 배선작업 중 사다리 추락사한 삼성물산 협력사 노동자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산업재해가 같은 형태로 반복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죠.
그 반복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를 무섭게 만듭니다.
어린 자녀를 두고 아파트 청소 현장으로 첫 출근한 날,
밧줄 하나에 의지해 일하다가 세상을 떠난 20대 청년 일용직 노동자를 추모하며
아까 소개해드린 이 책 속 2019년의 노동자 이야기를 읽어 보겠습니다.
안전로프 없는 사회
2019.10.29.
“유리창 청소 작업의 발주처는 가톨릭대 성모병원이고
원청은 대건기업, 하청은 설송기업이다.
숨진 이씨는 설송기업을 운영하는 개인 사업주다.
노동부는 이씨가 개인 사업주이기 때문에
산업안전보건 규정상 조사 대상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안전로프(구명줄)가 없었다.
엊그제 유리창 외벽 청소 중에 추락 사망한 노동자.
안전로프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건
떨어지면 끝이라는 것.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고
누군가의 소중한 이였을 사람
누군가의 안전로프가 되었을 사람.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고용한
자기 자신의 사장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조사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 안전로프가 없었는지,
그걸 물어봐야만 하는데.
사실 저는 평소에 채효정 님의 페이스북을 보면 신기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보통 다들 스마트폰으로 SNS에 글을 쓰기 때문에 길이도 짧고
표현도 줄여서 쓸 때가 많은데, 쓰신 포스팅들을 보면 길이가 긴 편인데도
그 안에 호흡이 살아 있고 참 잘 쓰시거든요.
데스크탑이나 노트북으로 쓴, 시간을 두고 정제된 글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쓴 글이라 해도
그래서 어쩌면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날 것일지도 모를 언어들이
당시의 감정들을 진솔하게 담아 시인 듯 칼럼인 듯 호소문인듯
굳이 형태를 규정하지 않아도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듯이 글쓴이 채효정 님은 정치학을 전공하셨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를 하다 해직된 후
학교 안팎에서 말로만이 아닌 몸으로 싸우고 연대를 만들어 냈던,
행동과 이론을 모두 게을리 하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강원도 인제로 귀촌하신 후에도
현재 <경향신문>과 <워커스>에서 칼럼을 집필 중이시고
교육공동체 벗에서 펴내는 잡지 <오늘의 교육>의 편집장으로서
기후위기, 노동, 교육 등 사회의 키워드들을
우리가 고민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이어 나가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말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행동하는 학자이자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이 시대에 질문을 던지는 글들을 만들어 냈겠지요.
이 책을 시작하는 저자의 서문에서 저는 감동해서 많이 울었는데요,
저자는 이 책을 완성하면서 편집자이자 포도밭출판사의 대표인 최진규 님에게
편집자로서의 닫는 글을 부탁하셨다고 해요.
SNS에서 먼저처럼 흩어졌을지 모를 언어를
먼지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책으로 담아낸 동료이자 동지로서
제안을 건네고 그걸 받아 마무리하는 두 분의 언어들이
이 책의 본 텍스트와는 또 다른 감동을 여러분께 선사할 것입니다.
내년에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앞두고 풍부한 토론은 커녕
매몰되는 분위기로 가고 있어서 많이 걱정 되는데요,
이 책을 구입하시고 표지에 형압으로 담겨 있는 텍스트들을
점자 읽듯이 손으로 한 번 만져 보시면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먼저 만나보신 후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오늘은 채효정 님이 쓰고 포도밭출판사에서 펴낸
<먼지의 말>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부디 오늘은 누구에게나 무탈한 날이었으면, 합니다.
* 이 글은 유튜브 <Analogue Radio>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방송 대본입니다. 본 방송은 https://youtu.be/kb4NaEZ1JVg 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