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아와 성자가 마주했던 길에 서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저 멀리 앞서간 내일의 나를 찾는 여정 같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을 삶의 의미는 딱 그만큼의 고유함으로 나를 이끈다.
삶과 인식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균열과 열반, 수천 가지 욕망이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방황하게 된다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나는 누구와 마주 보며 살아가고 싶은가. 씩씩한 영혼에도 세속과 나태함은 출몰하기에, 그들의 존재는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소년, 중년, 노년에 이르는 길목에서 반복적으로 꺼내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기록을 통해 과거의 나를 발견하고, 현재를 통찰할 수 있다면 매우 좋겠다.
형상의 수레바퀴는 빨리 도는 법이라면, 다양한 삶의 형태에 편향적 진리를 전달하기보다 스스로 깨닫게 놔두는 편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줬다.
헤세가 일 년 반의 자기 체험 기간을 거친 뒤에야 책을 다시 쓸 수 있던 것처럼, 일종의 자발적 고난이나 고립은 ‘어린애 같은 사람들 곁에서’나 ‘윤회’ 부분을 읽으며 계속해 스스로를 탐닉하고 되묻게 한다.
자기 자신을 모방하는 것은 애처롭지만, 타인을 모방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들 한다. 멋있게 사는 건 뭘까. 돌아오지 못한 탕아가 있고, 눈이 멀어도 볼 수 있는 성자가 있다.
또 한 달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