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통쾌한 장면이 있다.
통쾌한 장면이라고 함은,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장면을 말한다. 감정이 이입돼서 그 사람이 곧 내가 되면, 이런 느낌을 받는다. 비극을 볼 때 주로 이런 감정 이입이 된다. 주인공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 되는 거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감정 이입에 있다. 주인공의 슬픔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슬프거나 말거나 아무렇지도 않다. 영화를 보면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다. 재미가 있을 리가 없다.
통쾌한 장면 중 하나는 이렇다.
집단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마치 괴롭힘을 당하기 위해 태어났고 괴롭힘을 당하기 위해 학교에 오는 듯 보였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이 아이는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걱정됐다. 아이가 집단과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철렁한다. ‘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여지없다. 여지없이 괴롭히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는다. 화면으로 들어가서 괴롭히는 아이들이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느 날, 누군가가 등장한다.
어김없이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서 아이를 돕는다. 집단 아이들이 덤비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아이를 괴롭히던 집단은 더는 아이를 괴롭히지 않는다. 수호천사처럼 나타난 이 사람과 아이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잘 지내게 된다. 흐뭇한 마무리를 통해, 세상 어딘가에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서라도 도움을 주는 사람은 반드시 나타난다.
일상에도 보면 그렇다.
매우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때가 있다. 도무지 답이 없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자포자기하는 순간까지 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귀인이 나타난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함께 있지만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하지 못한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 도움을 주기 위해, 지금까지 함께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황이 도움을 줄 때도 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는 오른쪽으로 갔지만, 왼쪽으로 가게 되는 상황이 되는 거다. 소름이 돋는다. 도움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든다.
중요한 순간을 넘기게 될 때도 그렇다.
몸 상태가 안 좋고 목 상태도 좋지 않은데, 중요한 발표 자리에 참석할 때가 있었다. 발표 전까지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변한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하는 것 자체가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걱정을 한가득 안고 시작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 상태가 온전한 정도는 아니지만, 무리 없이 할 정도는 됐던 거다. 이 느낌에 힘입어, 몸 상태가 좋을 때보다 더 좋은 발표를 하게 됐다.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를 느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