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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Jun 04. 2021

7. 사랑과 집착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젊은이들의 스승이라 불렸던, ‘돈 보스코’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돈 보스코 성인은, 거리에서 방황하고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간 소년들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출소 후에도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돈 보스코 성인은, 아이들이 사랑과 관심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 충분히 교화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주일에 성당 마당을 개방하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했다. 당신도 함께 어울려 놀아주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더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수백 명의 아이를 데리고 광장이나 들판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허름한 집에서 출발한 오라토리오는, 청소년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고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치는 곳으로 성장하게 된다. 돈 보스코 성인은 후원을 받기 위해 평생 노력을 하게 된다. 오라토리오의 규모가 커지자 조금 더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하게 된다. 이후 몇 년 후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한다. 이렇듯 돈 보스코 성인은, 청소년들을 위해 평생을 몸 바친 사제이자 성인이라 할 수 있다. (참조: 나무 위키)     


돈 보스코 성인이 하신 이 말씀을, 고등학생 때 처음 접했다.

다니던 학교 인근 지역에, 직업훈련학교가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건물에 크게 붙어있었다. 고등학생의 눈에도, 이 문장이 참 괜찮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사실 이때는, 그냥 막연하게 좋은 문장 정도로만 생각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바로 주일 학교 교사가 되었다.

주일 학교 활동을 열심히 한 사람의 로망이 주일 학교 교사였다. 무슨 훈장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 주일 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 합격 소식을 기다릴 정도였다. 주일 학교 교사가 돼서 연수를 받으러 갔는데, 이 말씀을 다시 듣게 되었다. 그때는 부가적인 설명을 같이 듣게 되었다. 그때 이 말씀이 조금 더 마음 깊이 스며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중요한 건, 어떤 방법이든, 그 사랑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돈 보스코 성인의 말씀처럼, 사랑의 중심은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는 사람은 사랑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받는 사람은 사랑이 아닌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캠페인 중, ‘데이트 폭력’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라고 했다. 단호하고 명확한 목소리가, 한치의 여지도 없음을 알게 했다. 폭력의 시작은 억압에서 시작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려 ‘집착’하면 억압이 되고 구속이 된다.     


부모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구속한다.

행동을 구속하고 생각을 구속하고 마음을 구속한다. 날이 덥다는 이유로, 나가서 놀고 싶다는 아이들을 못 나가게 한다. 아이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 준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방법을 잊어간다. 마음이 가는 친구가 있더라도 부모가 봤을 때 가까이 지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거리를 두라고 이야기한다.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아서다. 중요한 것은,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과 생각 그리고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지원해주고, 이견이 있는 부분은 상의하면서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혼을 낼 때도, 사랑이 필요하다.

주변에서 아이를 혼내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은 아이를 사랑하니까, 잘되라고 혼을 낸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자신의 기분을 푸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잘못을 나무라는 것도, 그 사랑의 중심이 아이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으면, 화풀이가 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혼낼 때 이렇게 했다. 말은 엄중하게 하지만, 눈은 아이를 보며 이렇게 속으로 되뇐다. “아빠는 우리 딸을 사랑한다. 아빠는 우리 딸을 사랑한다.”

겉으로는 지적하고 있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전달될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내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붓는, 화를 내는 일은 최소화할 수 있다.  

  

<화내는 부모가 아이를 망친다>의 저자는, ‘화’에 대한 공식을 이렇게 언급한다.

‘화 = 스트레스 + 방아쇠 생각’. 스트레스는 화에 이르는 중요한 선결 조건이지만, 화의 반응을 끌어내려면 필수적인 두 번째 요소인 방아쇠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방아쇠 생각은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을 화로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방아쇠 생각이 설사, 사실이 아니라도 스트레스로 흥분한 상태에서는 그것을 진짜라고 여기고 화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방아쇠 생각이 화로 폭발되면서, 스트레스와 긴장에서 벗어나 짧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이유 중 많은 사실은, 아이의 행동이 잘못된 다기보다, 어디선가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방아쇠 생각이 당겨졌기 때문일 수 있다.     


아이의 문제 행동에 대한 방아쇠 생각에 대해 현실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하는 4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행동의 진짜 이유를 평가하라. 두 번째는 문제의 크기를 현실적으로 평가하라. 세 번째는 부정적인 속단을 중립적인 설명으로 대처하라. 네 번째는 당신이 화를 제어하고 냉정함을 지킬 수 있다고 상기하기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살피라는 말이다. 열정은 뜨거운 것이 좋지만, 화는 뜨거운 것이 절대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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