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잊고 열심히 할 때, 타인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
열정이 넘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넘쳐나는 열정이 본질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려진 본질을 보려 하지 않고, 뜨겁기만 한 노력은 누군가를 데이게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데인 사람 대부분은, 정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거나 약자이다. 역사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때는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왜? 본질은 보려 하지 않았으니까. 가려진 본질을 들춰보려 하지 않고 무조건 열심히만 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악행을 지시한 머리를 제외한 모두가 피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는, 콘크리트 바닥보다 흙바닥이 더 많았다.
어린 시절 자랐던, 지금은 알아볼 수 없게 변한, 동네를 지나갈 때면 기억이 떠오른다. 서울에 있는 거여동이었는데, 흙으로 된 벌판이 많았고 개울도 있었다. 흙바닥에서는 구멍을 파서 구슬을 넣는 놀이와 땅따먹기를 가장 많이 했던 걸로 기억된다. 생각해 보면 흙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는지, 바닥에 선을 그어서 했던 놀이가 많았다.
작은 나뭇가지나 뾰족한 돌을 가져와 선을 그었다.
흙바닥이라는 장점을 살려 몇 번을 긋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선을 반듯하게 잘 긋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일부러 그렇게 긋기도 어려울 만큼 삐뚤삐뚤하게 긋는 친구도 있었다. 나도 선을 잘 긋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래서 선을 잘 못 긋는 친구들끼리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놈이 그놈이라 아무리 해도 잘 늘지 않았다. 모여있는 친구 중에 선을 잘 긋는 친구가 없으면, 선 잘 긋는 친구가 나올 때까지 다른 놀이를 하기도 했다.
한 번은 농사를 짓겠다며 몇몇이 야심 차게 팔을 걷어붙였다.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풀을 한 더미 가져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심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름 농산데, 줄은 맞아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줄 잘 긋는 친구가 나서서 줄을 긋기 시작했다. 워낙 잘 긋는 친구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 잘나가던 줄이 갈수록 커브를 그렸다. ‘어? 뭐지?’ 줄을 그었던 친구도 갸우뚱했다. 친구는 다시 줄을 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반복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냥 심었다. 다음 날 나왔더니 풀들은 뽑혀있거나 힘없이 누워있었다. 일장춘몽까지는 아니어도 어린 마음에 커다란 아쉬움이 툭 하고 떨어졌다.
줄이 똑바로 그어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
짧은 줄은 잘 긋던 친구가 긴 줄을 잘 긋지 못했던 이유가 뭘까? 기준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준점을 보고 선을 그었다면 어느 정도 똑바른 줄을 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닥을 보고 선을 긋게 되면 내 눈에는 똑바르지만, 실제는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한참을 지나 허리를 펴고 나서야 휘어진 선을 발견하게 된다. 바라봐야 할 곳은 기준점이지 바닥이 아니다.
기준점은 본질이다.
무엇을 하든 그것을 해야 하는 본질이 있다. 법을 비롯한 규정과 약속이 그렇다. 혼자라면 크게 상관없겠지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다. 중요한 건,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규정이나 약속의 본질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놓치고 무조건 열심히 하면 어긋나게 된다. 바닥을 보며 열심히 그은 선이 똑바르지 않은 것처럼.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그런 게 아닐까?
무조건 열심히 무조건 빠르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그래야 내가 한 노력이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나의 의도와 다르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