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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Dec 14. 2021

234. 당위성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절대 정당성을 부여해서는 안 되는 것』    

 

“김대건 신부님은 당위성으로 사신 분입니다.”     

지난 달, 오랜만에 가톨릭 찬양사도단 ‘이노주사 찬양 공연을  날이다.

‘서울시 교우협의회 신앙대회’에 초대를 받았는데, 근 2년 만이라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직접 무대에 오른 건 아니지만 말이다. 마스크를 쓴 채로 했지만, 아이들이 율동하는 모습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가 감동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아이들을 격려하고 잠시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행사장에서는 신부님의 특강이 진행되고 있었다. 거의 끝나갈 무렵으로 보였는데, 이 말씀이 내 귀에 꽂혔다. “김대건 신부님은 당위성으로 사신 분입니다.”     


“당위성”이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내 머릿속과 마음을 맴돌았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신 김대건 신부님의 모습도 대단하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보다 이 단어가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지에 대해 더 무겁게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왔는지 돌아봤다. 마땅히 그래왔다고 자신하기 어려웠다. 당위성 뒤에 숨어있는, 한 단어 때문이었다.   

  

“정당성”이다.

사리에 맞아 옳고 정의로운 성질이라는 의미를 가진 정당성. 이 단어가, 동전의 양면처럼 당위성 뒤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왜 정당성이 당위성을 자신 있게 내세우는 데 걸림돌이 될까? 정당성도 사전적 의미처럼, 사리에 맞고 정의로운 의미가 있는데도 말이다. 정당성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서 정당성이지, 자기합리화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정당성의 잣대를 내밀었던 일을 떠올리면 그렇다.

당위성보다 정당성을 앞장세웠던 일을 떠올려보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내 상황에 비추어 재해석했다.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정당성, 아니 자기합리화를 통해 미화했던 생각과 행동이 있었다. 약속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지만, 못 지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밀어, 정당성이라는 포장지로 덮는다. 그렇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라며,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나에게는 정당성이지만, 다른 누군가가 볼 때는 비겁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에 당위성과 정당성을 양면을 보여준 드라마를 봤다.

비슷한 소제의 영화나 드라마도 여럿 있다. 경찰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복수하는 과정이다. 당위성으로 접근한다면, 범인을 잡아서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분노에 휩싸여 그 범인을 직접 죽이려 한다.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사실 누구나 이런 입장이라면 후자의 방법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드라마 대사에도 나오지만, 그렇게 하면 괴물밖에는 되지 않는다.    

 

당위성을 지켜야 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면 안 된다.

당위성을 지켜야 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생각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타협해서는 안 되는 일과 타협을 하려는 것과 같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를 보면 알 수 있다. 타협해서는 안 되는 일과 타협하면 돌아오는 건 후회밖에 없다.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기 전에,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되돌아와야 한다. 당위성을 지켜야 하는 것과 정당성을 부여해도 되는 것을 잘 구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금 시대에 필요한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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