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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Dec 27. 2021

243. 선택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을 취하고,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마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어릴 적 한 번쯤은 들어본 이야기다. TV에서 만화로 본 기억도 난다. 내용을 살짝 각색해서 요약하면 이렇다. 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고양이 때문에 불안해서 살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각자가 의견을 내다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온다.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 소리가 들리니, 그 소리를 듣고 숨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만 하면, 조금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 그럼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지 결정하시죠!”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적이 흘렀다. 방울을 다는 건 좋은데, 내가 그것을 하기는 싫었던 거다. 싫다기보다 두려웠던 거다. 자칫 잘못했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다가 결국, 각자 알아서 조심하기로 하고 흩어진다. 실행되지 못한, 좋은 아이디어로 끝나게 되었다.

    

쥐들은 두 가지 두려움을 가지고 저울질을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는 두려움과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이다. 두 가지를 비교하면 전자보다 후자의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매일 긴장된 몸과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피 말리는 것인가? 하지만 쥐들은 후자의 두려움을 선택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 선택을 왜 했을까?     


두 가지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원래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익숙하다. 익숙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두렵기는 하지만 익숙해서 견딜 만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는데, 뭐.” 두 번째는 총대를 메야 하는 두려움이다.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몇 배는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왜 혼자서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을까? 팀을 짜서 방울을 달 수 있는 아이디어를 냈으면, 큰 두려움 없이 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부담을 나눠 갖듯이.    

 

두려움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잘못을 했을 때가 그렇다. 잘못한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두려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결과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잘못을 저지른 순간, 그것을 판단하고 조치하는 몫은 이미 나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말을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뿐이다.      

어떤 판단이 현명한 판단일까?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 중 가장 안 좋은 것은, 자신이 떠안고 있는 거다. 자신이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못할 것을 떠안고,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 상상의 나래에서 좋은 모습이 보일 리 없다. 두려움에 두려움이 더해지고, 더 큰 두려움이 만들어진다. 아니, 만든다. 자신이 상상으로, 두려움을 더 크게 만드는 거다.     

어딘가를 갈까 말까 망설여질 때 가장 어려운 건, 한 발을 떼는 거다.

한 발을 떼면 두 발 세 발은 그냥 따라가게 된다. 처음 한 발이 어려운 거다. 한 발을 떼는 게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첫걸음이다. 거기까지만 용기를 내자. 그러면 두 발 세 발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더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어쩔 수 없는 거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두려움을 담아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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