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좋은 마음을 담아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나의 역할』
스물하나의 끝자락.
군대 입대를 한 달 정도 남겨놓고, 나름 정리(?)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정리랄 것도 없었지만, 마음을 좀 추슬렸다고 할까? 낯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마음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인생에는 넘어야 할 큰 산이 몇 개 있다. 개별적으로 넘어야 할 산도 있지만, 거의 가 공통으로 넘어야 할 산도 있다. 그 첫 번째가 군대라는 산이다. 면제되는 몇 가지 조건 (우리는 이런 사람을 신의 아들이라 불렀다)에 포함되지 않는 남자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이십 대 초반에 패기였을까?
‘이왕 가는 군대 끌려가지 말고 내 발로 가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고, 어느덧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내 발로 지원해서 입대 날짜를 받았다. 나중에 들었는데, 입대 경쟁률이 10:1이었다나 모라나. 사람들이 군대 못 가서 환장한 게 아니라, 시기가 그랬다. 98년 1월, 입대하고 나중에 알았던, IMF가 터진 시점이었다. 동기 중에, 최대 4수 끝에 입대한 친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난 참 세상 돌아가는 거에 둔감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말이다.
입대 전 마지막으로 했던 건,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나는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한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조용히 혼자 보내는 시간도 좋아한다. 고등학생 때, 생각을 정리할 게 있으면 혼자 산에 올랐다. 시간이 없을 때는 동네 산을 올랐고 하루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으면, 도봉산을 찾았다. 기억으로는, 일곱 번 정도 정상에 올랐다. 정상까지 헉헉대며 내달리다시피 오르면, 복잡했던 머리가 깔끔하게 정리됐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할 일이 있으면 주로 산에 오른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혼자 극장을 가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장군의 아들’(몇 회였는지는 기억이….)을 보러 종로에 있는 ‘단성사’를 찾았다. 영화표를 끊고 남은 돈으로 콜라를 사서 병에 빨대를 꽂아 마시면서, 영화 시간을 기다렸다. 그때는 액션 영화에 꽂혔었다. 총으로 하는 액션이 아닌, 맨주먹으로 하는 액션 말이다. 그래서 홍콩 영화도 참 많이 봤었다. 암튼.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내니, 줄줄이 끌려 나오는 기억들이 참 많다. 고구마 줄기 같은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는 거로 하고.
혼자 떠나는 여행은, 강원도 지역으로 정했다.
아! 강원도 하니까 또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억이 있네? 일단 접어두고. 첫 목적지는 강릉이었다. 일출을 보고 싶었다. 일출하면 정동진 아니면 경포대 얘기를 많이 들어서 둘 중 고민하다 강릉을 택했다.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한 택시 기사님에 이끌려(?) 경포대로 갔다. 민박집을 잡고, 답사 겸 주변 한 바퀴를 돌았다. 새벽에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어디쯤 서 있어야 할지는 봐둬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그때만 해도 잘 마시지도 못했던 맥주 한 캔을 사서 방으로 들어왔다. 몇 모금 홀짝홀짝하다 잠이 들었다.
아직 캄캄한 시간.
눈이 떠졌고 일어났다.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낯선 동네라 그런지 더 어둡게 느껴졌다. 전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계획했던 동선을 따라 바닷가에 진입했다. 제법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혼자 그 자리에 있던 건 나 혼자였지 아마?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으려는지 팔을 앞으로 쭉 뻗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주변은 더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기대했던 시뻘건 해는 바다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미 날은 다 밝아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둘 투덜대며 백사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뭐지?’ 어떻게 할지 몰랐던 내가 발을 돌린 건, 누군가가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나한테 말한 건 아니지만. “구름이 저렇게 잔뜩 켰는데 해가 보이겠냐?”
그제야 잔뜩 낀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날을 잡아도 참.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갈 수 있다는 독도를 가려는 것도 아니고, 일출 한 번 보려는 것이었는데. 야속했다. 발길을 돌려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기억으로는 몇 지역을 더 돌았는데, 한 5일 정도 돌아다녔다. 집 밥이 먹고 싶어서, 계획보다 조금 당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했던 일출을 보진 못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해가 뜨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이지 않네?”라고만 말했다. 깔렸던 어둠이 걷히면서 밝아졌기 때문이다. 왜 누구도 해가 떴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너무 유치한 질문인가? 주변이 밝아졌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원리나, 원래 그렇다는 이유를 빼면 말이다. 주변이 밝아진 것으로, 보진 못했어도, 해가 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를 보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어도 의심하진 않는다.
확실하게 하려면, 내 눈에 보여야 한다.
그래서 약속도 하고 도장도 찍고 문서도 만든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확실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더러 있다.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갈 때도 많다. 특히 사람 마음이 그렇다. 나에게 진심인지 거짓인지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도 있다. 확실하게 보이는 게 없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단,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마음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해가 보이진 않지만, 주변이 밝아지는 것으로 해가 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의 표정으로 나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최소한, 표정에 담긴 진심을 알아차릴 정도의 눈은 가지고 있다.
잘 모르겠다면 한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어떤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표정에 마음이 담겨있는지 생각이 담겨있는지를 말이다. 내 주변 사람들의 표정에, 마음이 담겼으면 좋겠다. 좋은 마음이 담겼으면 좋겠다. 조금이나마,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또 다른 소명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