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보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피고 그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기준
의도가 선하다면, 방법은 상관없을까?
이런 의문을 던지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형사가 범인을 잡기 위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어려우니, 약간의 변칙(?)을 사용한다. 형사는,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수단은 크게 상관없다고 말한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다른 형사는, 아무리 그래도 범인을 잡는데 원칙을 무너트리면 안 된다고 맞선다. 이 둘의 신경전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화를 보는 내 생각은, 시계 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 상황에 따라, 두 사람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이다. 원칙과 융통성의 경계가 참 어렵다. 두 가지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정해진 원칙에 따라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한번 무너진 원칙을 바로 잡기는 매우 어렵다. 기준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때 어떤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아무도 장담하기 어렵게 된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원칙에서 벗어난 방법에 익숙해지면, 그러지 않아도 될 때도 원칙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이유가 처음에는 정당성이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변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이 바로,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의도가 선하다면 방법이 일반적이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을 융통성이라 표현한다. 나는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참으로 많이 들었다. 그래서 융통성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변명이었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한 자기변명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융통성이라는 단어는, 자기변명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 생각이 유연(?) 해졌다고 해야 하나? 나름, 적절하게 융통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 돌이켜 보니, 이런 생각을 할 때부터였다.
원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원칙 자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원칙이 향한 방향을 바라봤다. 원칙이라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정이다. 그리고 서로가 한 약속이다. 규정과 약속을 지키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 다만 여기서 한 단계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원칙이 왜 만들어졌는가?’이다. 이것이 바로, 원칙이 향한 방향이다. 규정이나 약속을 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냥 심심해서 정하거나 만들진 않았다는 말이다. 상황이 그랬을 수 있고 서로에게 필요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상황과 사람들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규정이나 약속을 정할 때와 현재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그 시점의 상황을 살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융통성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자기변명을 위한 수단이 아닌, 현재 상황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한 수단 말이다. 원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잘 살피면, 그 원칙이 지금 상황에 적절한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든 원칙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곳이 있다.
사람이다.
사람을 향하고 있다. 광고의 한 문장 같기는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만든 규정과 약속은, 반드시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있을 이유가 없다. 원칙을 정할 때, 그리고 적용할 때도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옳은지 변칙을 사용해도 되는지 따지기 전에도 살펴보면 좋겠다. 그 방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보편 진리와 사람을 향하고 있는가? 원칙 그 자체 혹은 특정 사람에게 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