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춰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 없는 것처럼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진석 교수님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
첫 장,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마지막 부분에 소개하는 시입니다. 왜 이 시구절을 소개했을까요? 이유를 알려면, 첫 장이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아야겠지요?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문’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고 정의합니다. 이 무늬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이나 신념 그리고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것들은, 온전한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을 부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배받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오히려 이런 것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온전한 자기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시 구절을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각각에 온전히 몰입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춤추거나 노래할 때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마음껏 표현합니다. 사랑할 때는 주저함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일할 때는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닌 오직 그것에 몰입합니다. 그리고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아쉬움이나 주저함 없이 하루를 보냅니다. 이 모든 상황에, 다른 누구는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 있습니다. 이기적으로, 자기만 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거죠.
우리는, 이런 삶을 동경합니다.
시처럼 표현하진 않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시간과 경제의 자유를 얻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죠. 책에서 언급한 이념이나 신념 그리고 가치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이나 주변의 시선 그리고 처한 환경 때문에 어찌할 수 없다는 거죠.
온전한 나로 사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럼, 그냥 포기하고 살아야 할까요? 농담이지만, 재수 없으면 120세까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살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수명만 연장된다고 행복한 삶을 아니라는 겁니다. 건강한 상태여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모자람이 없어야 합니다. 계속 활동하는 무언가도 있어야겠지요. 이 세 가지가 균형을 맞춰줘야, 오래 사는 것이 복이 됩니다.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언제 어떻게 세상과 이별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요. 따라서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마냥 미뤄서는 안 된다는 거죠.
지금 삶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온전하게 나로 존재하는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합니다.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언젠가는 이라는 시간은, 잡히지 않는 시간입니다. 미루는 나를 안심시켜 주는 허상의 시간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혹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바로 해야 합니다. 나로 존재하는 것과 그 시간을 찾도록,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 가져야 합니다. 날 잡고 하겠다는 건 또 미루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홀로 있으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필요한 질문이 있다면 스스로 만들어서 물어보는 것도 좋겠네요. 소소하지만 지금 행복한 그것을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내가 온전히 몰입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뜯어말려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내일 죽어도 아쉬움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