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셋째 주 목요일 저녁에 하는 것이 있다.
아내와 같이한다. 우리 둘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시는 분들이 있다. 1지구 성령 기도회 찬양이다. 우리가 합류한 거다. 22년 10월부터 했으니, 올해 햇수로 4년 차가 됐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듯한데, 캘린더에 기록한 날짜를 보니 그렇다. 짐작하는 날 수와 실제 날 수 차이가 크게 나면,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번에는 좀 힘든 찬양이었다. 둘 다 감기 몸살을 앓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목이 아프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아 걱정했는데, 막상 시작하니 또 됐다. 이럴 때 신비로움을 느낀다.
이번 말씀 봉사자는 부부였다.
‘시몬과 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찬양과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었다. 예전에 우연히 음반 앨범을 본 기억이 있어, 찬양만 하시는 분들로 알고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참여하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분들이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책임감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부부가 함께 찬양과 말씀을 전하는 모습이, 우리 부부의 롤모델이라 생각됐다. 계속 꿈꿔오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라, 실제로 보고 싶었다.
우리의 준비 찬양이 끝나고, 시작되었다.
몇 곡의 찬양을 들려주었고 말씀으로 이어졌다. 말씀은 데레사 자매님이 하셨다. 삶에서 체험한, 사랑받은 경험을 들려주었다. 여기서 강조한 단어가 있었다. 사랑과 어울리는 온화하고 평온한 단어가 아니었다. 무엇이었을까? ‘고통’이었다. 사랑은 고통을 통해서 알려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체험한 내용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강도였지만, 이 메시지를 느낄 정도는 됐었기 때문이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처음의 물음표가 ‘아! 그래서였구나!’라는 느낌표로 바뀐 적이 몇 번 있었다. 세세하게 따지면 수없이 많을 테지만 말이다.
사랑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통으로 느낄 수 있고 사랑으로 느낄 수 있다. 처음에 느꼈던 고통이 훗날 사랑이었음을 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동전을 볼 때 방향에 따라 앞면이 보이기도 하고 뒷면이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이 둘은 별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붙어있다. 그래서 더욱 연관이 깊다고 말할 수 있다. 시선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는 거다.
선택할 수 있다.
어느 쪽을 더 많이 바라볼지 선택할 수 있다. 앞면을 볼지 뒷면을 볼지 말이다. 어느 쪽을 더 많이 바라보느냐에 따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달라진다. 고통을 더 많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불만을 담고 산다. 사랑을 더 많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감사를 담고 산다. 무엇을 담고 사느냐에 따라 끌어당기는 것도 달라진다. 고통과 불만은 그것을, 사랑과 감사는 또 그것을 끌어당긴다. 잘 생각해 보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혜택을 본 사례가 있다. 아니, 많다. 그것만 잘 알아차려도, 불만을 품고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받은 게 얼마인데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