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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비둘기 Mar 08. 2016

풍화의 슬픔

또 한 계절이 지나간다

마치 내 인생의 모든 것인 양 그 한 사람을 생각하고자 했고, 그녀를 놓치자 주변이 일그러지며 일상이 망가지고 아팠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화장실 문 앞에서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는 글귀를 보았다. 물론 꽃이 진다고 해서 그대를 잊은 것은 아니었으나, 꽃은 졌고, 그대는 잊혀갔다. 만개했던 꽃이 푸른 새로움에 떠밀려 떨어지듯이, 그녀에 대한 기억은 새로운 기억들에 밀려 희미해지고, 그와 함께 내 아픔 또한 희미해져서 정확히 어디가 아팠던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순간의 전부는 인생의 전부가 되지는 못하나 보다.

결국 계절이 변할 뿐이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 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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