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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비둘기 Mar 16. 2016

선릉역

세상의 균형

선릉역에는 밤다운 밤이 내리면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아주 평범하게 쇼핑백을 들고, 열정적으로 걸어간다.

어두운 밤을 뒤적거리는 이들을 위해 그들은 쇼핑백을 뒤적거린다.

그러다가 마치 어느 멋진 순간을 맞이한 듯이 쇼핑백 안에서 정열적인 붉은색 찌라시들을 꺼내어

하늘로 한껏 흩뿌린다.

촥-

자신이 흩뿌린 붉은빛을 뒤로한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묵묵히 걸어가다가,

또 자신만의 기준에 맞는 어느 순간에 이르면 다시 한 번 절도 있는 몸짓,

촥-

그를 뒤에서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잘 짜인 연극을 보는 듯하다.

그는 그렇게 선릉역 거리 순회공연을 마치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가 간 길 위에는 밤을 뒤지는 이들을 위한 표지판처럼 붉은색 번호들이 즐비하다.

그렇게 붉은 밤이 지나고,

여느 붉은빛들이 그러하듯, 다가오는 아침 빛에 표지판들이 퇴색될 때쯤이 되면, 새로운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분주히, 묵묵하게 붉은빛들을 주황색 쓰레기통에 담는다. 

아무 말 없이, 빛에 동요됨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밤의 열정과 아침의 침묵이 부딪혀 선릉역은 항상 묘한 평형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오늘도 그 평행봉 위로 아이들이 등교를 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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