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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바다 Nov 19. 2018

Taipei에서 얻은 깨달음

여행자로서 살아가는 일상

대만은 처음이었다.

상하이 출장을 마치고 곧바로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대신, 일주일 정도 멀지 않은 곳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교토, 홍콩, 서울 등을 떠올렸지만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라 끌렸다. 출장 전 상하이 출신인 Jimmy가 "대만은 중국 역사와 일본 문화가 오묘하게 뒤섞인 섬인데 역사에 관심 많은 네가 가면 분명 좋아할 곳"이라며 적극 추천한 것도 한몫했다. 열 번 넘게 갔어도 여전히 중국 음식의 강한 향내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타이베이는 위생 면에서 길거리 음식을 안전하게 사 먹을 수 있는 아시아에서 몇 안 되는 곳"이라는 그의 말에 음식 힐링도 맘껏 하고 싶었다.

상하이에서 타이베이까지는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서울의 명동과 비슷한 타이베이 중심가 시먼딩에 위치한 서문 홍루 <사진=강바다>

공항 MRT를 타고 Taipei Main Station에 내리니 추적거리는 빗줄기 속에도 후덥지근한 끈적거림이 느껴졌다. 중국과는 달리 자유로이 구글 맵과 우버를 쓸 수 있다는 게 낯선 도시를 홀로 헤매야 하는 여행자에겐 타는 갈증을 씻어주는 차가운 맥주와 다름없었다. 첫날 저녁 짐을 풀고 중앙로가 내려다 보이는 이층 카페에 앉았다. 잇몸마저 시리게 하는 아사히 캔 맥주를 들이키며 6일간의 휴가 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첫째 날, 오후 공항 도착, 다운타운 지리를 익힐 것

둘째 날, 국립 고궁 박물관 (National Palace Museum) - 총통 관저 - 시린 야시장

셋째 날, 중정 기념당 - 융캉제 (YongKang Street)

넷째 날, 용산사 - 보 피리 아오 역사거리 - 서문 홍루 - 시먼딩 일대

다섯째 날, 예류 지질공원 - 진과스 - 지우펀 - 스펀

여섯째 날, 타이베이 101- 쓰쓰난춘 - 저녁 식사

일곱째 날, 타이베이 - 홍콩 경유 - 뉴질랜드행


새로운 여행지에 오면 늘 그렇듯 이번 나 홀로 여행도 발 닿는 대로 하염없이 걷고 보고 먹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여행 말미엔 한 톨의 에너지마저 소진해 기진맥진해 버릴 것을 미리 알았지만 그 섣부른 걱정이 일탈의 뿌듯한 희열을 막진 못했다.

허우샤오셴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 (1989)의 무대인 지우펀  <사진=강바다>

여행은 특히 혼자만의 여행은 미처 몰랐던 나의 숨은 결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식가는 확실히 아니라는 것, 충동적이며 목표지향적이라는 점, 모던하고 화려한 명소보다는 이를테면 타이베이 101 보다는 쓰쓰난춘이, 시먼딩 보다는 지우펀 등 근대사와 그에 얽힌 역사적인 명소들에 관심이 많다는 것, 경험 우선적이지만 그다지 모험적이지는 않다는 이율배반적인 단면도 튕기듯 나타나 깜짝 놀랐다.  


여행이 그런 게 아닌가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것,

잊었던, 아니 잃었던 나를 재발견하는 낯선 모험, 그것이 아니던가


우선 아내가 적어 준 그 수많은 맛집 명소들, 선 메리 제과의 펑리수, 미미 크래커, 세계 10대 레스토랑에 꼽히는 딘 다이 펑 (DTF의 원조가 융캉제에 있다)의 샤오롱 바오, 융캉뉴러우멘의 우육면, 망고 빙수, 쌍장 카레, 삼미 식당의 대왕 연어초밥, 펑다 커피, 시린 야시장의 굴전 등 모든 곳을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 보았으니 먹지는 않았다. 아니 못 먹었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 오랜 시간을 줄 선 채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였고, 꼭 맛을 봐야겠다는 절실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대신 골목 귀퉁이에 위치한, 마치 1960년대쯤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회귀한 듯한 작은 일본식 식당의 나무 테이블에서 앉아 천천히 나 혼자만의 식사를 즐겼다. 우육면을 후루룩 거리며 대만의 일상 속에서 뚜렷하게 존재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융캉제의 그 번잡한 많은 맛집들 보다 이곳이 한눈에 끌렸다  <사진=강바다>

타이베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도 평균 이상의 맛을 냈다. 일본 여행 때 교토의 이름 없는 작은 식당들이라도 깔끔하고 정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울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변두리 식당을 가면 흔히 보게 되는 모습 - 운동복 차림 또는 맨발의 슬리퍼 차림이나 때 국물이 꼬질한 앞치마 차림으로 얼렁설렁 고객을 맞는 주인의 모습도, 고춧가루나 음식 찌꺼기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식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놓는 삼류 식당들이 즐비한 그런 곳들과는 많이 달랐다.

대만을 오기 전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이 이것이었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어떻게 달랐길래 날카로운 반일 감정을 지금까지 숨기지 않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문화와 습성이 사회 곳곳에 또 대만인들의 정서 속에 여전히 짙게 배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의문은 대만을 사업 차 자주 드나드는 Jimmy, 대만인 아내를 둔 스코틀랜드 출신의 교사 Ian과 얘기를 나누면서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

일본 도시의 주거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거리 위의 인도와 속도 제한 표시

우선 식민지 이전의 상황부터 많이 달랐다. 조선에서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으로 어수선하던 19세기 말, 그때까지 2백 년 넘게 대만은 청나라의 하찮은 변방 지역에 불과했다. 중국 본토 중앙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억압에 시달렸다가 청일전쟁에 패배한 대가로 일본이 대만을 접수하게 된다. 이 식민지 시기를 대만 사람들은 ‘일치(日治) 시기’라고 부른다. 아직도 일본이 대만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 여기는 대만인들이 적지 않다. 그 일치 시기 동안 일본 제국주의는 대만의 기반 산업 시설과 교육, 의료, 행정, 사법 제도를 정비하여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해주었고, 문화적으로도 식민지의 '일본화'를 위한 유화적인 동화정책이 대 성공을 거둔 결과였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의 식민지 지배로 받으면서 근대화된 대만은 6백 년간 지속되던 조선왕조 말 자주독립국을 지향하다 망한 우리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중정 기념당에서 멀지 않은 융캉제, 서울의 홍대 앞과 비슷하다 <사진=강바다>

낯선 도시에 오니, 한가하게 머리를 식히기는커녕 1주일이란 짧은 시간 동안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 6시쯤 호텔로 들어온 뒤 다시 저녁 탐험을 나서는 일정이 매일 계속되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서 일까.
MRT의 Red, Blue, Green 라인을 몇 번 타보니 서울 지하철 노선과 비슷해 어디든 쉽게 다닐 수 있었다. 우버나 버스 등 편리한 교통수단 대신 1시간 정도의 거리는 모두 걸어 다녔다. 고궁 박물관과 근처에 있는 장개석 총통의 시린 관저 (CKS Shilin Official Residence)만 우버를 탔다. 나중에 걷기 앱을 보니 평균 14,000보에서 많이 다닌 날은 18,000보 넘게 매일 걸었다. 대만에서 꼭 봐야 할 곳 10가지, 먹어야 할 것 10가지, 해야 할 것 10 가지 등 총 30가지를 추린 후 지역 별로 나누어 '공략'했다. 언뜻 스쳐가다가 끌리는 장소들은 모두 사진으로 담았고 걸어 다니며 지나친 생소한 모습들도 파편 조각처럼 모자이크로 아로새겼다.

천등 마을 (Sky Lantern), 스펀 <사진=강바다>

바람에 흐드러진 꽃망울처럼 이방인으로 잠시 머물다가는 것이다. 낯선 것들은 모두 새로웠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여행이다 보니 그 새로운 것들이 모두 아쉬웠다. 10가지가 아니라 100가지를 뽑고 그 100가지를 다 가고 보고 먹고 했더라도 안타까움은 여전했을 것이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고

가질 수 없어 떠나보내기에 애절함이 절실한 것인가


잠시 머문 뜨내기 여행자에겐 이국적인 그 낯선 거리들과 풍광들이 그곳에 사는 타이베이 시민들에겐 매일 보는 무덤덤한 일상의 답답한 그림일 뿐일 것이다. 어제에도 있었고 내일도 틀림없이 보게 될, 이제는 넌덜머리 날 만큼 지겨워질 수도 있는 생활의 편린들이 이방인에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험 가득한 보물섬인 셈이다.

관광국가인 뉴질랜드에서도 타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쉽게 마주친다.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내가 너무 뻔해 생각 없이 지나치는 벽돌담과 목조 건물 옆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그들을 마치 내팽개쳐지듯 놓인 노천카페의 의자만큼이나 무심하게 지나친다. 공항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객들의 아쉬운 눈길과도 종종 마주친다. 이제 그들이 돌아갈 일상처럼 무미건조한 매일을 무덤덤하게 보내고 있는 내게 이제 막 이방인의 모험을 겪고 돌아온 또 다른 내가 지우펀의 찻집, 시먼딩의 치즈케이크 카페, 예류 공원에서 만난 필리핀 로저네 식구, 시린 야시장의 낡은 건물 외벽에 얼룩진 빗물 자국들의 이미지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며 소리 없는 외침을 지르고 있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여행자의 일상을 살아 보라고.

마지막 날 쓰쓰난춘에서 담은 노을 걸린 저녁거리. 옆 카페에선  쳇 베이커인지 'Autumn in New York'의 트럼펫 연주가 흐르며 고즈넉한 분위기와 맛깔스럽게 아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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