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바다 Jan 14. 2019

서안에서의 깨달음

사소한 것은 모든 것이다

몇 년 전 중국 서안(Xi'an)에서의 일이다.

11월의 날 선 초겨울 바람이 꽂히듯 몰아치던 늦은 오후였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만들었다는 화청지를 둘러본 후 뒤편 작은 산에 올랐다. 높지 않지만 꽤나 가파르다. 일행은 여섯, 오클랜드에서 함께 온 협력사 대표 D가 끼어 있었다.

화청지 - 두 번째 서안 방문에서 들렀다 <사진=강바다>
화청지 내부 - 57세의 황제는 22세의 며느리에게 '비익조, 연리지'라는 연시를 남겼다. 전설의 새는 암수가 같고, 전설의 나무는 같은 뿌리의 가지란 뜻이다 <사진=강바다>

서안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정상에 이르며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메고 있던 내 카메라를 잡았다. 그런데 아차! 렌즈 뚜껑이 잡히질 않는다. 언덕을 오르면서 풍광 좋은 곳 몇몇을 틈틈이 카메라에 담았는데 그 와중에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다. 잠시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지고 주위를 훑던 내게 D가 내려가면서 찬찬히 함께 찾아보자고 했다.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서안 시내 <사진=강바다>

멀리 서산 너머로 해가 넘어간 지 오래다. D와 내가 일행에 뒤떨어진 채 사진 찍었던 곳들 마다 멈춰서 주위를 샅샅이 훑으면서 내려갔다. 두세 군데를 30분 넘게 촘촘히 찾다 보니 불그스름한 노을빛은 사라지고 차갑고 시퍼런 어둠이 산등성이를 덮은 채다. 얇은 재킷 속으로 칼바람이 날카롭게 살갗을 베고 있다. 만사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가 뜨거운 샤워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D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이며 반 발자국씩 조심스레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 속, 부서진 잎사귀를 차근차근 들춰내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쳐다보며 내가 "렌즈 뚜껑 없어도 그만이고 일행도 기다릴 테니 이제 그만 내려가자"라고 했다. 그가 정색하며 "렌즈 뚜껑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없으면 렌즈에 흠집 나기 쉽고 자기도 그렇게 못쓰게 된 카메라가 있다"며 조금만 더 찾아보자"라고 했다.
잠시 후, 추위에 반쯤 얼어붙은 나완 달리 땀으로 번질거리던 얼굴을 연신 훔치던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파안대소했다. 그 까만 렌즈 캡을 까만 어둠 속에서 기여코 찾아내서 일까. 뿌듯해하던 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지난 금요일 우리 측의 업무 착오가 생겼다.

이대로라면 호주 사무소에서 발급되어 협력사 대표 D에 전달되는 서류는 주말을 넘기고 월요일 오후, 늦으면 화요일 오전이나 되어야 정상 서류가 나올 것이다. 고객에게 서비스를 약속한 협력사로선 커다란 낭패였다. 시각은 이미 금요일 오후 4시, 이미 한 주간의 업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직원 대부분이 주간 업무 정리로 바쁘니, 부득이 다음 주 월요일까지 기다려야겠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내가 챙기겠다'는 전화를 넣어야겠다고 습관처럼 생각했다.
불현듯 3년 전 서안에서 보았던 화청지의 노을 풍경이 살포시 떠올랐다. 산 너머로 해가 졌었고 화청지를 찾은 방문객들 몇몇이 경내를 배회했다. 생채기를 낼 듯 매서웠던 그 초겨울 바람, 이름 모를 등성이마다에서 벌어졌던 지치고 배고프던 렌즈 뚜껑 수색 작업, 그리고 땀으로 번들거리던 얼굴을 연신 닦아내던 D의 모습도 함께.

<사진=강바다>

시드니와는 2시간의 시차가 있기에 그쪽 팀 담당자와 즉각 통화했다. 업무에 연관된 단계 별 업무 별 담당자를 모두 되짚으면서 전후 설명을 차근차근 반복해서 해주었다. 2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수정된 서류가 재발급되었다. 전화기 너머 껄껄거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화청지 뒷산 어디선가에서 파안대소하던 그의 모습과 기분 좋게 겹쳐졌다.


영화 '역린'에 나왔던 유명한 중용 23장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진다.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세상까지 변하게 하고 싶은 커다란 야망까진 없다. 그저 배우려고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보고 있다. 보이지만 못 보는 것투성이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알아도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배움의 여백은 언제나 활짝 열어두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것으로 채우기 위해.

  

사소한 것이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내가 갖고 있는 사상이나 생각, 또는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나의 가치관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행동 따위와는 무관하다. 그건 허구일 뿐이다.

진정성이란 내가 무심결에 하는 행동일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있을 때 하는 생각과 말, 행동이 나의 본모습일 것이다. 오랫동안 배우고 쌓아 터득한 내면의 생각이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은연중에 사소한 말과 행동에서 배어 나올 것이다. 그것이 나를 정의한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넓은 사람 좁은 사람 두려움이 없는 사람 두려움에 떠는 사람 자신을 믿는 사람 맨날 걱정만 하는 사람 친절한 사람 부정적인 사람 자신의 민낯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사람 다른 사람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쓰는 사람 나를 치유하는 사람 나를 갉아먹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얽매인 사람 결국 다 보일 것이다.

사소한 것은 모든 것이니까.

이전 07화 Bali에서 얻은 깨달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