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나무

기차 여행 - 스물 하나

by 강바다

40대 중반의 남자가 슬라이드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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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신부와의 결혼식 사진, 어린 아들과 해변에서 뒹구는 모습, 스코틀랜드 전통복장을 한 채 백파이프를 부는 모습, 가족 친구들과의 바비큐, 등산복 차림의 아이들과 찍은 숲 속에서의 하이킹 사진, 아내와 이마를 맞댄 채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휴가 사진 등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한 남자의 삶, 그 일부를 엿볼 수 있는 슬라이드가 한 장씩 한 장씩 성당 벽에 걸린 커다란 프로젝터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매년 5월이면 웰링턴 성공회 대성당에선 장기 기증자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감사 미사가 열린다.

자신의 꺼진 생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증함으로써 시한부의 생명들을 벼랑 끝에서 살려낸 이들을 위한 미사다. 약 3백여 명이 참석한 미사엔 뇌사 판정을 받은 남편의 장기를 기증한 아내가 남편의 40여 년 생애를 추억하면서 생전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를 보여주었다. 남자의 아내가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삶의 고통과 즐거움을 매 순간 함께 나눈 영혼의 동반자였다’는 말이 내 귓전에서 웅웅 거리며 떠나질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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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신장, 폐와 안구를 4명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한창나이의 남편을 불시에 떠나보낸 그 아내의 감당할 수 없는 슬픔, 그 슬픔 한가운데서 남편의 장기를 기증한 그 아내의 용기와 남자의 희생에 압도되어 슬라이드를 쳐다보는 내 시선이 마구 흔들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는 옆에 말없이 앉아 있는 아내의 손을 가만히 꼭 쥐었다.

뒤이어 이번에는 3년 전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50대 후반의 남자가 이름도 모르는 기증자의 심장으로 새 생명을 얻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자칫 얼굴도 못 볼뻔한 손자를 안아보게 됐다는 얘기, 아내와의 은혼식 얘기와 더불어 2년 전부터 노인들을 위한 자원봉사자로 작은 보답을 하고 있다면서 자신에게 심장을 기증한 망자와 그 가족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축복을 보냈다.

미사 중간에 장기 기증을 받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모두 제대 앞으로 나와 촛불을 켜는 감사의 예식이 있었고, 미사 마지막 부분에는 장기 기증자의 가족들에게 동백나무 화분이 하나씩 선사되었다. 동백나무 (Camellias)는 품종의 어원이 ‘기증’ (Donation)에서 유래했으며 ‘명이 짧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고 미사 안내서에 소개되어 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남녀가 바로 우리 앞에 앉아 있다. 앞에 앉은 젊은 여성이 미사 내내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다. 미사가 끝난 후, 짐작했던 대로 동백나무를 받고 나가는 그녀의 작고 쓸쓸한 어깨가 너무 안쓰러워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인사라도 전하며 위로하고 싶다.

미사가 끝난 텅 빈 성당에 잠시 숨을 고르며, 별나라 유람을 먼저 떠난 이들을 찬찬히 가슴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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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개념조차 없는 공간, 고통이나 아픔, 질병이 없는 편안한 공간으로의 이동이 죽음이라면, 비록 육체는 소멸되지만 현생에서의 기억을 가진 영혼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 아닌 재회가 별나라에서 펼쳐질 것이다. 그 ‘아름다운 별나라 유람'을 기다리며 열심히 이 동토에서의 기차 여행을 즐거이 계속해야겠다. 과거를 돌아다보며 후회도 회한도 가질 필요 없으며 오지 않은 미래를 서둘러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금 당장 숨 쉬고 있는 현재에 몰입해서 살면 그것으로 된다. "인생이란 우리가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게 딴전을 피우는 동안 코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간들의 집합"이라는 존 레넌의 정곡을 찌르는 비유처럼 일상 속의 사소한 것에 감사하면서 마음을 열고 배우면 우리는 언제든 어디서든 행복할 것이다.


나의 지금이 행복한 것은 과거와 다르기 때문이리라. 지난 시간 동안 그저 군더더기, 생활의 사치로 여겼던 일상의 작은 것들,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 생활의 0순위가 되었다.

현미밥과 시래기 된장국에 꽁치구이를 곁들인 맛있는 저녁을 먹은 후 아내와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산책한다. 아내의 손을 잡고 1시간 남짓 어둠이 푸드덕 자리잡기 시작한 한적한 동네 어귀를 돌아 작은 언덕길을 오른다. 등 뒤론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산골짜기다. 도시에 살면서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하고 쥐 죽은 듯 고요한 산등성이를 바라다보면 감탄이 절로 터진다.

6월의 겨울밤 하늘에 뿌려진 별들을 목이 뒤로 젖혀질 만큼 바라본다. 2백 개는 되려나 별들을 세다 보니 몇십 개의 밝은 별들 주위로 뿌옇게 둘러선 별밭들이 눈을 가득 채운다. 2천 개 아니 2만 개도 넘을 듯싶은 은빛 점들로 된 환상의 별밭이다.

‘저것이 남십자성 자리인가’, ‘북동쪽에 유난히 빛나는 저 별은 무슨 별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려 본다.

오래전 잠자리에 드는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틴틴의 모험’을 읽어주던 때가 또렷이 생각난다. ‘어제는 다섯 페이지째에서 잠들었는데 오늘은 10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어찌 눈이 초롱초롱한가’ 한편으론 지루해하면서도 그렇게 해주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슴푸레하게 동이 튼다.

이슬에 흠뻑 젖은 나뭇잎새를 바라보며 청명한 새벽의 고요를 품어본다.
코를 간질이는 미풍에 그리운 사람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 매일 대하는 직장 동료들, 슈퍼마켓 계산대의 직원에게 ‘오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며 한껏 밝게 웃는다.
스산한 가을바람에 떨어져 발끝에 뒹구는 낙엽들을 주워본다. 얼마 전까지 매끄런 푸른 잎을 싱그럽게 드러냈던 잎새들인데 어느새 마른 갈색의 잎사귀로 가벼이 부서져버린다.
그걸 쳐다보다 문득 지금 올바르게 열심히 살고 있는지 되짚어본다.

나쁜 짓은 많이 하지 않았는지…
여전히 용서하지 않은 채 증오의 독을 품고나 있진 않은지…
현재의 처지에 감사하기보다 원망과 불만을 터뜨리고 있지나 않은지…
나만을 위해서만 살고 있지 않은지…
별나라 유람을 먼저 떠난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오늘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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