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레온 리더십
D는 매니저가 된 지 1년이 지났다. 30대 초반이지만,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되었다. 파트타임부터 시작해서 정직원, 9년이 지난 후 매월 매니지먼트 미팅에 정식 참석하는 매니저가 되었다. 연봉도 올랐다. 매니저가 되기 전까지 회사를 옮기네 마네 하면서 볼멘소리만 내뱉던 그가 세 명의 팀원을 통솔하며 회사의 한 부서를 담당한다. 잘해 보이겠다는 열정과 사기가 대단했다. 아직 사내 정치나 사교성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내 직속은 아니지만 가장 긴밀하게 일하는 부서이기에 회사 전체 이메일 또는 매니지먼트 회의석상에서, 또는 회식 자리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직간접으로 그가 이끄는 팀의 업무 능력과 그의 리더십을 칭찬했다.
A와 B는 나의 외부 협력사 중 가장 실적이 좋고 개인적으로 가까운 협력사 대표 두 사람이다. 그들과는 수시로 식사하고 회식 자리를 가지고 업무 협력을 긴밀하게 도모하며 시장 상황에 대해 긴밀한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해왔다. 우리 회사의 서비스와 제품을 선봉에 서서 팔아주는 대리인이므로 당연히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했다.
C는 인턴 겸 파트타임으로 주당 5~10시간씩 내 업무를 지원하는 나의 Sales Assistant다. 처음 한 두 가지 일을 시켜 보니 주어진 시간 내에 기대 이상의 일을 훌쩍해내는 재원이다. 공대에 재학 중이면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수시로 그녀가 내 기대치보다 얼마나 일을 효율적으로 잘하는지 동료들과 주위 팀원들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당사자 앞에서 칭찬도 서슴지 않았다.
업무가 몰려 있는 어느 한 주동안 위 네 사람과의 관계가 동시에 삐꺽거렸다. 처음엔 쭈뼛쭈뼛하던 D는 자신감을 넘어 기고만장해졌고, A와 B는 의례 식사와 술 등 모든 경비를 내가 부담하는 걸 당연시 여겼다. C는 작은 프로젝트지만 마지막 나의 승인 없이 일을 진행하다 최종본의 색상이 뒤바뀌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외통수의 성격으로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유연함이 부족한 D는 슬그머니 내 앞에서까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난 그냥 기다렸다. 언제나 져주고 손해를 보더라도 참으면서 가능한 그의 기를 한껏 살려주었는데 이를 서서히 줄였다. 사내외적으로 내보내던 겉치레 칭찬도 일절 하지 않았다. 대신 업무의 잘잘못을 하나하나 따끔하게 지적했다. 시간 내에 처리하지 못한 업무의 원인과 실수들은 D와 그의 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점검했다. 향후 효과적인 개선 방안과 문제 대응 방안에 관한 팀 전체 의견을 수렴한 뒤 이것은 도, 저것은 모라고 분명하게 결정 내려주었다.
A와 B의 경우 워낙 가까운 관계인지라 농담 삼아 '오늘은 네가 한 번 사라' '이번엔 네가 한 번 쏠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옆구리들을 몇 번 슬쩍 찔러대니 금방 알아들었다. C는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냈다. 마냥 이뻐하기만 하다가 꾸중을 들으니 마음이 상하기도 했겠으나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처럼 편한 관계로 회복되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칭찬이란 주제가 관통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인간관계를 한 주동안 동시에 겪고 처리하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이 배움은 오래전에 경험한 '호의가 권리가 되어 버린' 과거의 한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십 년도 지난 오래전 일이다. 당시 내가 일하던 직장에서 학생들을 위한 수업이 있었다. 오전 8시라 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많은 학생들이 아침식사를 못하고 오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마침 학생 휴게실에 토스터도 있겠다 싶어 아침 출근 때마다 2달러짜리 식빵 한 봉지씩을 휴게실에 놓아두었다. 매일 그러던 것이 나의 개인 사정 또는 깜빡 잊은 탓에 식빵이 사흘에 한 번씩 그러다가 일주일에 한 번으로 드문드문 해졌다. 그러자 대뜸 학교 측으로 다수의 불만 사례들이 접수되었다. 왜 매일 있던 식빵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침을 굶고 수업에 오는 학생들이 안타까워 내 사비로 그리고 익명으로 매일 식빵을 사다 놓아두었으나 이미 그것은 나의 호의를 떠난 학생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가 되어 버렸다.
그때 사건으로 '호의는 일순간의 감정에 의해 무턱대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라는 차가운 현실을 배웠다.
칭찬은 필요하다. 감사가 나를 위한 것이라면 칭찬은 상대를 신바람 나게 하는 천하무적의 무기이다. 그 칭찬은 즉각적으로, 구체적으로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필요한 시점마다 분명한 선을 그어 줘야 한다는 걸 이번에 배웠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할 런지 모르겠다. 칭찬 듣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 칭찬이 듣는 사람을 오만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자만심이란 그물에 엉키기 시작하면 춤추던 고래는 한순간 미끄러진다.
리더십이란 항상 져주고 언제나 손해 보면서 섬기는 것이 아니다. 때론 알면서 져주고 뻔한 손해도 기꺼이 감수하면서 부드러워야 하지만, 따뜻함 대신에 날 선 차가움, 섬김보다 일순 상대를 압도하며 군림하는 카리스마도 보여줘야 한다. 유연함과 강인함이 혼재된 리더는 일차원의 예측 가능한 리더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광폭의 스펙트럼은 각양각색의 인간군들을 수없이 겪고 경험하며 양쪽의 극단을 누비고 넘나들면서 쌓인다. 카멜레온 같은 광폭의 리더십은 그렇게 표출한다.
바로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배우며 추구하는 리더십 모델의 원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