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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an 05. 2022

젠장! 염라대왕도 이력서 타령할까?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이력서를 써 오라고 연락을 받으면, 한참을 컴퓨터 앞에서 끙끙댄다. 뭐 이력서 한 장을 놓고 그렇게 힘들어해야 하는지 속상하고 답답하다.

있는 그대로 쓴다면 못할 것도 없는데, 너무 복잡하게 쓰지 말고 간단하게 쓰라는 주문이 붙으면 더 난감하다. 중학교 졸업까지는 그런대로 쓸만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당시 졸업한 학교가 강원도 내에서는 명문이었기 때문인데, 그다음엔 내 화려한 군대 이력을 빼고 나면 쓸거리가 없다.

스무 살 안쪽은 예의 그 명문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것과 그리고 햇수로 7년여를 몸 바쳤던 제복에의 생활, 지금은 그 선호도가 천양지차로 변했지만 한때는 우리 모군 해병대를 기피하던 때도 있었다. 

전역 후 세상을 확 뒤집어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지방에서 정치에 관여하면서 보낸 8년의 룸펜 생활, 그리고 그 후 정부 통제하에 있는 공사(公社)에 5년 그러면 벌써 나이 40이 되어 버린다. 그 후 이일 저일 안 해본 것 빼고는 다해 보았으니 이력서가 간단할 수가 없다. 차라리 수필이나 한편 써오라면 훨씬 더 쉬울 거라고 혼자 투덜대며 이력서와 씨름을 한다. 일천한, 보잘것없는 내 이력 때문에 아예 취업을 포기한 일도 있었거늘 무엇을 해도 자신 있는데 꼭 그 부분에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손수레를 끌고 과일 행상을 했다고 할 수도 없고, 포장마차를 했다고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핑계인즉슨 난 성질이 급해서 남의 밑에선 일 못한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작은 장사 수준에 일을 하며 말이 좋아 개인 사업을 한다며 그런대로 살아왔지만 어디서나 자신 있게 이력서를 내놓을 수 없었던 세월을 살며 스스로 마음고생을 해왔다.

학력을 불문에 붙인다면서도 어디서나 그 보이지 않는 학력의 벽은 나 같은 사람들을 크나큰 콤플렉스로 정신적 장애인을 만들어 버렸다. 내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당신이 믿을 만하고 빈틈없는 일처리가 맘에 든다며 칭찬을 하면서도 막상 중요한 일에 당면하면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학벌 좋은 동료에게 일임하는 것을 보며 좌절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처절함을 모를 것이다. 


"젠장 염라대왕도 이력서 보자는 것은 아니겠지? 퉤!" 이런 자조의 말을 독백으로 뱉으며 시리도록 서러운 세월을 저 많은 인간군상들과 섞여 살았다.

이 나이에 다시 또 이력서 쓸 일은 없을지라도 난 당당하게 내 이력서를 내놓고 싶다. 아니 나 죽어 관에 들어갈 때 내 이력서를 함께 묻어 달라고 할 생각이다. 

그 이력서를 내가 혼자 뱉던 말 대로 염라대왕 앞에 내놓을 생각이다. 늦었지만 나도 학교 다닐 만큼 다녔노라고, 여기 이력서를 보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제 학벌위주의 인사정책에서 탈피하겠단다.

이 말을 믿어도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어도 후학들을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경우야 다를지 몰라도 지금의 우리 학우들이나 급우들이 제각기 그런 말 못 할 가슴 아픈 사연들 한두 가지는 경험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들과 동병을 앓았던 동지적 입장에서 그들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와 같은 경험자가 있을 것이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그 같은 벽을 느낄 학우도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방통고를 30년 전에만 알았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생각해 본다.

내 굴곡진 삶, 미운 오리 새끼처럼 홀로 가슴앓이하면서 숙명처럼 살아온 내 삶을 어느 날 백조가 되어 창공을 날아오를 화려한 비상을 위해, 오늘에 충실한 열일곱의 학생으로 되돌아가 새 삶을 설계할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우리 급우 모두와, 우리 모든 학우들과 함께 창공을 날아오를 찬란한 무지개를 꿈꾼다. 이젠 염라대왕도 두렵지 않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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