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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Feb 23. 2022

무심 초(無心 草)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무심(無心)을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마음이 없다'로 풀이되고, 다른 뜻으로 표현한다면 '생각이 없다'로 해석되기도 한다. 득도(得道)한 고승들에게서 흔히 마음을 비워 무심(無心)하다고 하니, 이는 인간 최고의 수양으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고,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無所有) 또한 이 범주에 속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무소유는 일반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하고 있으나, 불교에서는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범위를 넘어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함이니, 범부(凡夫)인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흉내조차 버거운 승화되고 정제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논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백치가 가지고 있는 맑고 순수함을 무심의 경지라고 스스로 정해놓고 성인들을 같은 부류로 만들곤 한다. 그렇게라도 무심할 수 있었으면 하고 소망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보기 싫고, 듣기 싫고, 원망스럽고, 밉고, 화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백치가 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바보가 되어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한 말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침묵하면서 백치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아픔이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상대의 가슴에 상처를 만들어주고, 돌아서서 고민하고 후회한다 해도 때로는 상처받은 상대보다 더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병들게 한다. 

간혹 후회하면서도 "미안해. 내 탓이야." 하며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필부(匹夫)가 겪어야 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입으로는 바보가 되고 싶다면서, 바보 탈출을 획책하고 만학(晩學)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한다.

내 마음속에 욕심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내가 손해 보며 살리라는 생각은 마음뿐인가 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욕심으로 겸손을 배우고, 스스로 인간됨을 깨우치고, 현실 도피자가 아니라 <수상록>의 저자 프랑스의 몽테뉴처럼 온갖 거짓말이 난무하는 불신의 시대, 교만과 권모술수가 하나의 가치관이 되어 혼탁한 사회를 형성하는 현대사회에서 독야청청 진실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갈구하고 있다고 내 만학(晩學)을 스스로 변명한다. 


처음으로 내 글이 활자화되고, 오를 수 없는 높고 아득한 성벽 같았던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리던 날, "글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어느 선배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나는 더 많이 배워 철학을 담겠다는 것을 뼈에 각인하고 인간 수양을 위해 배움의 길을 찾았다.

배움은 도(道)이며 길이다. 그 길에서 겸양의 도를 찾을 수 있다면, 한 점 후회 없는 삶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해서 무심초(無心草)가 되고 싶다. 하루하루 더 낮아지고, 오늘보다 더 겸손한 삶을 살며 맑은 마음으로 세상사에 초연한 잡초처럼 밟히며 살아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 마음 없는 들풀, 무심초가 되고 싶은 것이다. 

백치라 불린다 해도 어쩌면 내 인생 역정에 더 이상의 철학이 무슨 대수 일까 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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