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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h on Aug 30. 2021

매달 보름달이 떠서 다행이야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파이 이야기)'가 개봉했을 때의 일이다. 손을 에는 강추위가 연일 계속되는 평범한 서울의 겨울이었고 나는 스무 살이었다. 어릴 때부터 판타지나 모험소설을 좋아했던 나는 인도 소년 파이가 벵갈호랑이 한 마리와 바다 한가운데에 표류하게 되는 소설책 ‘파이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고,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두근거렸다. 상상력을 동원해 읽어낸 그 소설이 당시 최첨단 기술력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반전과 복선도 곳곳에 숨어있는 꽤나 복잡한 스토리였지만 그것들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황홀했다. 파이나 호랑이가 무엇을 상징하든, 그 긴박함을 즐거워하던 어린 내가 기억나서 행복했다.

조금은 상기된 종종걸음으로 영화관을 나왔다. 영화가 끝나고 추위는 더 세졌던 것 같다. 상영시간 동안 해가 졌으니 기온은 더 떨어졌으리라. 영화관이란 사실 두 시간 동안 현실과 단절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다. 상영관의 불빛이 꺼질 때 휴대폰은 잠시 꺼놓거나 무음으로 하고 보지 않는다. 오롯이 영화를 보는 시간은 휴대폰을 보지 않아도 되는, 누구나 인정하는 합당한 핑곗거리를 제공한다.



걸어 나오면서 본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많이 찍혀있었다. 가족들이 몇 번이고 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문자나 카톡이 없이 찍힌 부재중 전화 몇 건은 불안감을 가져다주었고, 그 불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언니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스무 살의 나는 그렇게 함께 살던 누군가를 잃는 경험을 처음 맞닥뜨린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할머니는 오래 아프셨지만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추운 겨울 밖에서 일을 하고 집에 오신 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급격한 온도차가 할아버지의 약한 심장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 곧장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펑펑 울었는지 놀라서 눈물도 안 났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어두운 버스 창밖으로 눈이 펑펑 쏟아진 것만 기억난다. 하늘을 덮을 만한 눈발이었다.

그 이후로 영화관에 갈 때마다 문득 그날의 기억이 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동안 나는 영화나 보고 있었다는 죄책감이 주가 되어 온갖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까운 가족을 잃는 경험만으로도 벅찼을 때였던 것 같다. 물론 당시 누구도 나를 꾸짖진 않았고, 지금의 나 또한 그때의 나를 탓하진 않는다. 그저 영화관에 들어가고 핸드폰 밝기를 최저로 하는 그 순간 잠시 그날의 기억과 풍경이 머릿속을 스칠 뿐이다.

비슷하게, 작년 가을 보름달이 휘영청 떨어질 것 같은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보름달이 가장 크다는 한가위 바로 다음의 달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장례식장으로 향할 때 꽉 차다 못해 넘칠 것 같은 큰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보름달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겠구나.

할머니의 죽음도 할아버지의 죽음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뇌고 되뇌어도 스무 살의 나는 영화를 보던 게 죄스럽다는 이유로 한동안 영화관에 가는 게 겁이 났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받았던 충격을 소화해내는 과정이었을 뿐,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곱씹는다거나 그리워한다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스물여덟의 나는, 달마다 한 번씩 가득 차오르는 달을 보면서 할머니를 추억하기로 했다. 내가 가장 어렸고 미숙했고 사랑을 원했던 어린 시절에 할머니는 할머니의 방법으로, 투박하지만 진실된 사랑을 나에게 주었다. 반면 나는 사랑을 주지 못하던 못난 시절에 할머니와 살던 게 가장 아쉽다. 나중에 할머니를 만나 그땐 사춘기여서 예쁜 말을 못 했다고 하면 할머니는 나를 용서해줄 테지만 나는 눈물만 흘릴 것 같다.

지난달처럼 이번 달 말에도 보름달이 뜰 것이다. 많이 사랑했다고 말하려고 한다.

2021.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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