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용어 중 ‘역치’라는 것이 있다. 역치란 어떠한 세포나 근육 따위가 반응을 느끼기 위한 최소한의 자극을 말한다. 같은 힘의 자극을 주었을 때 부드러운 손등은 그 힘을 느끼지만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발뒤꿈치는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손등의 역치는 발뒤꿈치의 역치보다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역치가 작을수록 예민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역치가 각기 다른 집단들이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정해진 계급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경제적 지위, 사회적 지위 즉 부와 명성으로 대변되는 가치들에 있어 강자와 약자는 여전히 그리고 여실히 존재한다. 우리 사회가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강자의 것을 빼앗아 약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있어 절대적인 가치인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그들을 차등대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자동차 주행 시 규정 속도보다 20km에서 40km를 위반한 경우, 6만 원의 벌금을 물게 된다. 이 6만 원이 부의 강자와 약자에게 가하는 자극의 양이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자극의 양이 속도위반이 갖는 위험성을 규정하고 다음번 시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 둘도 없이 위험한 일이다. 부자에겐 6만 원이 벌금이 아닌 스피드가 주는 스릴감 또는 목적지까지 빠르게 가기 위한 주행에 대한 대가 즉 요금으로 인식될 것이며 이는 속도위반을 막는 효과를 전혀 지니지 못한다. 고속도로 속도위반 절반은 외제차라는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국산차와 외제차의 비율을 따져보았을 때, 속도위반 차량의 절반이 외제차라는 것은 지금 시행되고 있는 과태료가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그들의 부에 이렇다 할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속도위반이 교통사고를 야기하고, 이것이 주행자뿐 아니라 타인의 목숨까지 담보하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대로는 안 될 일이다.
우리의 몸이 마음대로 기관의 역치를 조정할 수는 없지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은 조정할 수 있다. 물이 뜨거운 지를 알아보려고 손가락 대신 여린 귓불을 갖다 대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가 강자와 약자의 부를 직접적으로 조율할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자극의 양을 달리 하여, 우리 몸 어느 곳도 아프지 않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