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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14. 2020

곰신이 뭐예요?

연애 이야기- 꽃신. 나빌레라(3)


그는 현역으로 입대해야 했지만 대학 졸업 후로 입대를 미뤘고 졸업 후 입대 전에 경력 한 줄 쌓으러 들어온 회사였다. 그곳에서 연애를 시작할 줄 몰랐고, 그러다 깊어졌고, 더 이상 입대를 미룰 수도 없어서 그는 군대에 가야했다.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연애였지만 20대 후반의 나에게 이 상황은 난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랑에 빠진 채였고 "기다리란 말은 안할게"라는 그에게 "난 의리는 지켜"라며 멋진 척을 했었다. 그리고 몇날며칠을 울어댔다. 전화를 하며 걷던 퇴근길, 당연한 일상의 교류, 잠들기 전 나른한 통화 등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나는 늦은 나이에 사랑에 빠진 나를 욕하고 나를 두고 가버린 님을 욕하고 마지막엔 국방의 의무가 있는 이 나라를 욕하고 그렇게 세상 모두를 욕하고 또 욕했다. 아니, 민주주의 국가가 연인을 갈라놓다니!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만큼 절박했다.

.....


그리고 공허가 찾아왔다. 나는 새롭게 몰입할 대상을 찾아해맸고 (...원래 뭐든 빠지면 일단 열심히 해보는 스타일) 나보다 6~7살은 어린 사람들이 가득한 '곰신'카페에 가입, 나름은 열심한 군바라지를 시작했다.


곰신이라는 말이 나와 관련있는 단어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입대한 남자친구를 차버리는 여자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배신의 상징인데, 그 말에서 나오는 고무신을 줄여 곰신이라는 단어가 생겼고, 입대에도 불구하고 애정전선을 지키며 ‘고무신을 제대로 신고 있는’ 이들을 곰신이라 불렀다. 위대한 사랑꾼 곰신들이 전국 각지 팔도에 엄청나게 많음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곰신카페에 모여든 여성들은 어렸고 순수했고 귀여웠으며 군대에 갔다는 그들의 남자친구 또한 몹시도 어렸다.카페에 올라오는 '젊은이들'의 일상을 엿보면서 한없이 괴리감을 느끼다가 나이 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버린 나의 장점은, 직장이 있다!!!는 것! 직장이 있다는 것은! 월급이 들어온다는 것!

갓 20대의 풋풋한 젊음을 가진 그들이 깜짝 놀랄 늙은이의 열정을 보여주고 말테야! 라는 이상한 오기로 불타오른 나는 주소가 확인된 그 순간부터 편지를 보내고, 간식을 보내고, 선물을 보내고, 사진을 보내고, 열혈 정성을 쏟았다.






내가 사는 지역으로 자대 배치를 받아 왔을 때에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 기뻐했다. 그리고 주말마다 면회를 가 얼굴을 보고 마주앉아 있었다. 평일에는 주말에 같이 볼 영화와 음악을 고르고, 주말에는 군대 면회실에 '출근'해 그와 함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었다. 결혼 준비를 해야한다는 20대 후반의 상황. 친구들도 다들 연애 중이라 주말에 만날 친구도 없었고, 입대 전에 열심히 만나야 한다는 이유로 학원이며 스터디도 다 그만둔 상태였기에 오로지 곰신짓에 매달린 그런 세월이었다.


서른을 앞두고 군대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나에게 후회하지 말고 소개팅을 해보라는 지인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저 "의리를 지킨다"는, 이 나라의 군인같은 마음으로 꿋꿋이 지냈던 것 같다.


이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내 감정에 빠져서.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오지은 곡)


우주를 가득 채운 사랑과 블랙홀처럼 커지는 불안

입속을 가득 매운 키스와 꽉 쥔 두 사람의 손도

내 마음을 가득 채운 너의 마음

언제나 아쉬운 가로등 밑

비누방울처럼 영롱한 시간은 언제 터질 줄 모르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날 사랑하고 있다는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날 바라보는 게 아니고

날 바라보고 있다는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나에게 했던 수많은 말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 입술

귓 속을 가득 메운 음성은 눈을 감으면 사라져

세상에 유일하게 영원한 건

영원이란 단어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지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간이 한참 지나 돌아보건데,

당시의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내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사랑을 지켜내는 그런 캐릭터에 빙의되어 지나치게 꿋꿋했고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직장을 찾으며 큰 꿈을 꾸다 적당히 현실에 타협한 후였기에 무언가 갈구할 만한 다른 대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애를 통해 또다른 이상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체가 없는 꿈을 쫓아 헤매이듯,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두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쫓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내 안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마음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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