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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02. 2020

나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다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다. 4~5학년 무렵 전업주부였던 어머니가 '갑자기' 과일가게를 열었다. 가정의 주수입원인 아버지는 일을 하다 그만 두다 했고, 일을 하든 안 하든 밤에는 술에 취해 있었다. 할아버지까지 함께 살던 좁은 집, 오빠와 나는 초등학생, 어머니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듯 하다.


가게는 작았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 모퉁이에 어머니의 가게가 있었다. 가게 앞에는 커다란 전봇대가 서 있었고, 전봇대에는 온갖 전단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전봇대의 기세 덕에 가게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과일이 진열되는 공간 너비가 30cm 정도 됐을까, 그 뒤로 진열 공간보다는 조금 더 넓은, 1~2사람이 앉으면 가득 차는 가건물이 있었다. 골목길 끝에 톡 하고 떨어뜨려둔 작은 성냥갑같은 가게였다. 매일 새벽 어디서 오는 지도 모를 트럭이 가게 앞에 과일들을 내려주면 어머니는 새벽에 나가 그 과일들을 가건물 안으로 들였고, 우리를 학교에 보낸 후 다시 나가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과일들을 옮겨 담아 진열대에 올렸다. 그리고 하루 종일을 그 성냥갑 안에서 손님들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한 후, 그곳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곤 했었다. 내가 가면 어머니는 한 쪽에 뒀던 나를 위한 과일쟁반을 꺼내 오셨다. 거기엔 상처가 난 과일, 물러버린 과일들이 모여 있었다.

"니가 좋아하는 과일 실컷 먹으니 좋지? 엄마가 가게 하길 잘 했지?" 어머니가 물으시면,

"아니, 엄마. 나도 저기 있는 예쁘고 깨끗한 과일들 먹고 싶어"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깎아주는 과일을 날름날름 받아 먹으면서, '와, 달다' 생각하면서도, 그런 대답을 잘도 했었다.


어머니 가게에 있던 어느 날, 가게 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 아이가 보였다. 같은 반 친구였다. 그 친구를 보자마자 몸을 숨겼다. 진열대 아래로 갑자기 숨어버리는 나를 향해 어머니가 물었다.

"왜?"

"저기 오는 애, 같은 반 애거든."

"그래? 불러서 과일 좀 줄까?"

몸을 일으키려는 어머니를 숨어 있는 상태로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니, 엄마. 안돼!"

"왜?"

"쪽팔리잖아!"

"....응? 뭐가?"

"이 가게가! 장사하는 엄마도 쪽팔려!"

"........"


어머니는 한참을 아무 말이 없다가 그 아이가 지나갔다며 나를 일으키셨다. 얼마 뒤 가게는 문을 닫았다. 처음 하는 장사가 신통치 않았던 건지, 딸의 헛소리 때문이었던 건지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정리하고 다시 주부로 돌아오셨다.




어려서 그랬다는 핑계로 넘기고 싶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마찬가지였다. 입사 후 몇 달 지나지 않은 때에, 점심시간을 앞두고 전화가 왔다. 아버지였다. 그 당시 '잠시' 술을 끊으셨던 아버지는,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오셨다며 점심이나 한 끼 사라고 말씀하셨다. 반갑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 막내였고, 회사 선배들과 먹는 점심이 더 즐거웠다. 아니, 좀 더 솔직히, 갑자기 찾아와 내 '일상'을 흔드는 아버지가 불편했다. 하지만 회사 앞이라고 하시니 단칼에 거절하기도 어려워 망설이다 나갔다. 


아버지가 서 계셨다. 본인의 옷을 사 입으시는 법이 없었던 아버지는 늘 삼촌들에게 맞지 않는 옷, 주변의 누군가가 입지 않는 옷 등을 받아서 입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한참 지난 때였고 나도 오빠도 직장 가까이서 자취를 하고 있던 상황. 혼자 지내시던 아버지는 그 얻은 옷들을 '대충' 꿰어 입고 다니셨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헐렁했고, 색깔도 늘 혼란스러웠다. 아래 위로 헐렁한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계신 아버지가 나는 부끄러웠다.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고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태워 보내드리면서도, 함께 있는 내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신입사원다운 정장을 차려입었던 나는, 곁에 있는 내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자라는 내내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했었다. 번듯한 직장을 갖고 번듯하게 차려입은 부모님을 가진 아이들이 부러웠었다. 중2병을 심하게 앓던 때에는 '잘난' 나에 비해, 부모님은 왜 저렇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부끄러웠고 숨기고 싶었다. 내 부모, 내 배경, 내 가족.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렇게 자랐다. 내가 학교를 다니고 쑥쑥 자라나는 건 다 내가 잘난 덕분이라 생각했었다. 부모님이 가난에 허덕이는 건 부모님이 못나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모님이 능력이 있다면 내가 더 풍요롭게 자랄 수 있을 텐데, 부모님 탓을 수천번 하며 자랐다. 왜 그토록 부정하려 했을까. 내 것이 소중한 줄 몰랐고, 남의 것만 부러워하기 바빴다. 나에겐 드라마에 나오는 '부자' 부모님이 어울리는데, 이 집에서 잘못 태어났다고도 생각했다. 매일 가난에 대해 생각했다. 왜 가난할까. 이렇게 가난한데 왜 해결을 못할까. 내가 학교를 다니고 쑥쑥 자라느라 집이 더더 가난해진다는 건 생각조차 못했다. 참, 놀랍도록 이기적인 사고였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지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해 보곤 했었다. 우선 과일가게에서 친구를 부르고 싶다. 큰 소리로 친구를 불러서 과일을 나눠주며 "우리 엄마 가겐데 과일 진짜 맛있어" 하고 말하고 싶다. 옆에 계신 어머니가 좀 으쓱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자랑스럽게 말해 보고 싶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직접 백화점에 가보고 싶다. 여름에는 티셔츠, 겨울에는 외투, 편안한 신발까지, 아래 위로 멋지게 입혀 드리고 싶다. '홀아비' 냄새 폴폴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근사한 새 옷 입은 아버지로 만들어 드리고 "매일 이 옷만 입고 다녀요" 애교도 부려 보고 싶다. 


어머니 아버지 둘 중 누구든 계시기만 한다면, 해보고 싶은 건 많고 많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이렇게 먹는 거예요. 딸 덕에 호강하죠?" 말해보고도 싶고, 유명한 펜션에 가서 "꼭 영화같죠. 함께 와서 좋아요" 해보고도 싶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에 모시고 가서 "신기하죠. 요즘은 이렇대요" 해보고도 싶고, 영화도 같이 보고 싶고, 커피도 같이 마시고 싶고, 술도 마시고 싶고, 밥도 먹고 싶다..... 아니, 무엇보다 그냥 얼굴을 보고 싶다. 마주 보고 앉아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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