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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Nov 30. 2020

"힘드시죠" 말할 수 있었다면

중고등학생 시절, 학교를 마치고 독서실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서 못다한 공부를 독서실에서 마무리하는 그런 학생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날이면 독서실로 향했다. 술을 드시는 아버지가 무서워 독서실에 앉아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도피처였다. 


어머니가 암선고를 받은 이후 4~5월 무렵, 그 밤에도 독서실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그저 앉아만 있는 날들이 많았다. 

깜박깜박.

침묵의 공간인 독서실. 1층 안내데스크에서 호출을 누르면 책상 앞에 붙어 있는 조그만 전구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시스템이었다. 보통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거나 독서실로 온 자녀가 연락이 닿지 않을 때 그 호출 시스템이 이용됐다. 독서실까지 나를 찾아 오는 사람은 없었기에, 내 자리에 그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잘못 누른 것이라 생각하며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깜박깜박. 음? 빨간 불빛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순간 생각난 것은 어머니의 '끝'. 매일 '괜찮으실거야'를 외치며 다니던 때였지만, 그 빨간 불빛을 보는 순간 떠오른 건 죽음이었다. 


학교에서도 공지를 위한 방송알람이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다. 방송에서 내 이름이 갑자기 나오면 어떡하지 긴장했다. 수업 중 교실문을 누군가 두드려도 심장이 떨어질만큼 놀랐었다. 누군가 나를 찾아올 것 같았다. 내가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어머니에게 갑작스레 나쁜 일이 벌어지고, 그 일을 알리려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는 상상을 하며 매일매일 두근두근 긴장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벌써? 말도 안돼!"

1층으로 후다닥 내려갔을 때, 뿌얘진 눈 앞에 보인 것은 아버지 모습이었다. 팔을 들어올리다 만 것 같은 자세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던 아버지. 아버지도 나도 이런 상황이 어색해 서로를 바라본 채 2~3초쯤 흘렀다. 긴박한 상황이라기엔 지나치게 차분해 보였다. 

"엄마는요?" 

"자는 거 보고 잠깐 나왔다. 짐 챙겨 나와라, 집에 가자."

"..............."


안도한 것도 잠시, 짐을 챙겨 나서면서 아버지가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신 것인지 의아했다. 술에 취해 있거나 주무시거나 하셔야 할 분이 왜 갑자기?

독서실에서 집은 도보로 20분 쯤 걸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거리가 천리길은 되는 듯 느껴졌다. 아버지와 단 둘이 길을 걷는 상황 자체가 평생 처음인 것 같았다. 지나치게 조용한 그 길을 우리는 어색하게 걸었다. 아버지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나란히 걷기에도 어색해서 거리를 뒀다. 그 밤, 공기가 유독 차게 느껴졌던 건, 아버지와 나 사이에 들어찬 어색함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수 분간 침묵이 이어졌다. 아버지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발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이 어색함을 벗어나는 길은, 1초라도 빨리 집에 도착하는 것. 그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빠르게 걸었다. 


"엄마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얘기라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내 두 발은 갈 곳을 잃은 채 그 자리에 멈췄다. 아버지는 뒤에서 좇아오는 나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속도를 높이든 멈추든 같은 속도로, 터벅터벅 바닥만 보고 걸어가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몇 달 못 살 것 같다. 의사들 하는 말도 그렇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아버지를 따라 터벅터벅 걸으며 침묵을 지켰다. 무어라 말을 해야 했지만,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만큼 목이 매였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울리려고 굳이 이 밤에 여기까지 찾아오신 걸까. 


우뚝. 이번에는 아버지가 멈춰섰다. 아버지를 앞질러 갈 수도 없어 나도 멈췄다. 아버지의 등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어둠이 펼쳐진 앞만 보시며 말씀하셨다. 

"이제 너랑 나, 둘이서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그 말씀을 끝으로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하셨다. 아버지와 나, 단 둘. 어머니가 없을 집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앞서 가셨기에 나도 따라 걸었다. 아버지는 땅을 보고, 나는 아버지의 등을 보며 그렇게 걸었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 이 밤이 오래오래 생각났다. 아버지는 그때 갑자기 왜 나를 찾아오셨을까. 아마 아버지는 힘드셨을 것 같다. 술로 보내버린 젊은 날들, 곁을 지키던 아내가 갑자기 떠나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 그 모든 감정들을 끌어 안기도 버거웠을텐데, 자식을 포함한 주변 모두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감정들 사이에서 문득, 밤 늦게 귀가할 내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단 한 번도 묻지 못했었다. 그날, 왜 나를 데리러 오셨었는지를. 


요즘은 조금 알 것 같다. 아버지도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누구라도 붙잡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아버지도 힘드시죠."

이 정도 말쯤은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런 말을 하기엔 마음에 쌓여있는 미움들이 너무 컸다. 미움이 너무 가득 들어차 있어서, 그 어떤 말도 다정하게 뱉지 못했다. 그런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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